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국 (문단 편집) === 멸망 ===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만주국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뭐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이 겁도 없이 진주만을 공습해 미국과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간다. 미국에게 시종일관 밀리던 일본은 만주국의 병력과 물자까지 차출해가며 발악을 했지만, 전황이 악화되면서 만주국 방비를 위해 배치된 관동군 병력들은 하나둘 전선으로 차출되어 갔다. 이러다보니 그 빈자리는 현지 일본 주민을 징집하거나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부대가 대신하였기 때문에 대전 말기에는 만주국의 전쟁 대비태세가 상당히 취약해졌다. 결국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실시된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일거에 괴멸해버렸다. 이미 관동군의 정예는 남방전선으로 빠져나간터라 속 빈 강정이었다. 소련군의 진격으로 혼란에 빠진 뒤, 그대로 [[푸이]]가 체포되고 만주국도 무너졌다. 개전 7일만의 멸망. 그리고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지 2일 후인 8월 17일에 국무총리대신인 장징후이가 주재한 중신회의는 임시수도인 퉁화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에는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다가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 인계받았고, 다시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에 최종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되었다. 만주 사변 이전에도 중국에서 가장 유망한 지역에 일제가 설치한 막대한 산업시설이 소련의 점령 이후에도 상당수 남아있었기에 국민당과 공산당 둘 다 만주 탈취에 혈안이 되었다. 장제스가 "동북을 탈취하지 못하면 중국은 근대 산업국가로 발전할 수 없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할 정도. 만주 지역의 마적 떼와 만주군의 잔당들은 알아서 국민당군과 공산군으로 제각기 갈아탔다. 한동안 국민당군이 주둔했으나, 소련은 그들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 공산군의 피난처를 제공했다. 훗날 조선족으로 분류될 이들이 공산군에 보충된 건 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순조롭게 [[중국공산당]]은 만주를 냠냠. 이와 연관된 시대사는 [[간도]] 문서를 참조. 만주국 함락과 함께 [[히키아게샤|거주 일본인들]]은 먼저 냅다 튀어버린 관동군에게 버림받고 소련군과 현지 한족들의 무차별 공격과 약탈, 강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포화 속에서 살아남아 천신만고 끝에 귀국해서도 멸시와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탓인지 만주국 태생 일본인들 중에는 공산당이나 좌파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 곳 출신 유명인으로는 성우 고 [[토미야마 케이]], '[[내일의 죠]]'로 유명한 [[만화가]] [[치바 테츠야]][* 출신지는 도쿄지만, 어린시절에 만주국에서 살았다.], '천재 바카본' 시리즈의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 공포 만화로 유명한 [[히노 히데시]],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전자전대 덴지맨]]의 주제가를 부른 [[애니송]] 가수 [[나리타 켄(가수)|나리타 켄]],[* [[성우]] [[나리타 켄]]과는 [[동명이인]]이다.] 성우 [[후지타 토시코]][* 이 명단에 올라온 사람들 중 출생연도가 늦은 편이다. 1950년 출생.] 등이 있다. 이렇게 해외에 체류하다가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한다. 만주국의 최후는 한 나라의 멸망치고는 다소 흥미롭다.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황제 푸이도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8월 18일 [[압록강]] 유역의 다리쯔(大栗子)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해서 '''만주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해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