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사변 (문단 편집) == 여파 == >'''"[[일본군|적]]을 죽여라! 적을 죽여라! 모두 일어나 적을 죽여라!"''' >---- >일본의 만주 침략을 들은 중국시보의 헤드라인. >"일본은 만주를 지키기 위해서 [[루거우차오 사건|중국 북부를 침략]]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중국 북부를 지키기 위해서 [[제2차 상하이 사변|중국 중부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리하여 결국 [[대동아 공영권|아시아 전체]]를, 나아가 [[세계 정복|세계 전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결국 불가능을 행하려는 것이며 스스로 짊어진 무거운 짐에 의해 압도되게 되는 것이다."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77373&cid=44546&categoryId=44546|미키 기요시(三木淸)]], 1935년 12월. [[1차 양광사변]]과 [[제3차 초공작전]]에 매달리던 장제스에게 그야말로 뒤통수를 제대로 날려버린 사건으로 결국 충격을 받은 장제스는 [[탕산 사건]]으로 감금되었던 [[후한민]]을 석방하고 남방의 반장파들도 동조하면서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광서파 등 강경한 반장파들이 협력 조건으로 장제스 하야를 요구하였으며 [[슝시링]] 등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헌정운동을 벌여 장제스를 압박함에 따라 [[1931년]] [[12월 15일]], [[장제스]]가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뒤를 이었던 [[쑨커]]는 한달 만에 버티지 못하고 사퇴해버렸고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합작하여 [[장왕합작]] 체제를 구축, [[1932년]]에 군사위원장으로 복귀하였다. 또한 중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군수공업지대를 날려버린 재앙이었다. 만주는 일찍이 열강들과 봉천군벌의 투자로 근대적 통신망과 교통망을 부설하고 공업화를 이룩했던 바, 봉천군벌이 소유한 '''동3성 병공창 하나에서 생산되는 화포와 탄약이 나머지 군벌 소유 병공창에서 생산되는 화포와 탄약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이게 전부 일본의 아가리로 들어갔으니 국민혁명군의 무장이 더욱 열악해진 것은 안봐도 비디오. 만주 사변으로 중국 본토로 도망친 장쉐랑은 훗날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결국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대륙을 제패하는 복선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국공내전]] 발발 직전까지만 해도 국민당의 우세는 확정적이었으며 [[장제스]]가 잘만 대처했어도 공산당 제압, 최소 만주를 제외한 중국의 지배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후 무리한 만주진공 작전으로 몰락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까지 공산당의 목숨을 붙여둔 1등 공신이 바로 일본의 침략.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은 어떻게 해서든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지만, 중국 공산당의 패퇴 직전이라는 참으로 적절한 상황에 이 짓을 저질러준 덕에 중국 공산당은 기사회생했다. 그야말로 군인들 몇명이 역사를 크게 바꾼 셈이다. 그리고 '''일본 군부에선 정부 명령을 씹고 행패를 부린 이시와라 간지 등이 처벌받긴 커녕 잘도 진급하고 영전하자 하나같이 저들처럼 한바탕 해보자! 라는 모험주의 열풍이 불게 된다.''' 이후 타이완의 장교들이 관동군이 만주를 먹었듯이 푸젠성을 먹기 위해 푸저우에서 부랑자들을 매수하여 일부러 일본인 교사들을 살해하는 자작극을 벌이기도 했고 '''[[무타구치 렌야]]는 [[루거우차오 사건]]에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신나게 논 이시와라 간지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 일본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쳤는지 뒤늦게 깨닫고 노구교 사건에 이르러선 일본의 개입에 반대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자업자득이었다. 무엇보다 이시와라 역시 일시적이나마 대중 확전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중국사에 남을 치욕적인 날이다 보니 당연히 중국 전체가 폭발했다. 난징, 상하이 등 중국의 주요 대도시마다 흥분한 젊은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일본을 규탄하면서 일본과 무역하는 자들을 처벌하고 당장 대일선전포고를 해야한다며 목청을 높였고 수천 명의 학생들이 자원입대를 요청했다. 다만 국민당은 해당 공작을 국민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판단해 선전포고를 끝까지 거부하고 대신 장기적인 안목, 군벌 토벌과 경제 안정화에 집중하기로 한다. 자세한 설명은 [[중일전쟁]] 항목 참조.[* 2015년 9월 기준으로 아직 확립이 되어있지 않으며 후일 추가할 예정. 과거에는 해당 판단이 국민정부의 친일성을 강조하였지만 막상 학생들 역시 삼민주의 타도, 국민정부 타도같은 구호를 외치는 단체가 존재하는등 친공적인 성격이 소수 존재하였다.] 무엇보다 당시 중국은 일본을 상대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 6년이나 더 준비한 중일전쟁에서도 그렇게 큰 피해를 냈는데 군 현대화와 공업화 정책이 시작도 되지 않은 1931년 시점에 일본에 덤빈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였다. 이후 공산당은 "이게 다 장제스 때문이다!" 라고 만주를 일본에 잃은 것이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에드거 스노우]] 등이 공산당의 일방적 모략을 진실인양 세계에 퍼뜨리면서 장제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웠지만 애초에 중국 공산당도 1935년까지 '''[[XX하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일본이 침략 좀 하면 어떻냐, 우리 세력권 확대하면 그만이지]]'''로 일관하는 막장 세력이었다(...). 정작 공산당은 만주사변과 열하사변 때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이동하는 국민혁명군을 습격하며 이득을 취했고 [[대장정]] 이후 섬서성에 정착해서는 [[기동사변]], [[수동사변]] 등 일본군이 내몽골과 화북을 장악하기 위해 도발하는 틈을 타서 '[[동정항일]]' 운운하며 국민당 뒤통수나 치고 다니면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국민당군을 습격하는 게 항일이라는 실로 괴랄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뻔뻔하게 하고 다녔다. 이러한 태업을 넘어선 통수는 중일전쟁에 절정을 달렸다.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후 마오쩌둥 본인부터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줘서 고맙다' 라고 했을 정도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항일은 뒷전이고 공산당 토벌에 정신이 팔린 장제스' 때문에 만주를 잃었다는 공산당 측의 비난과 달리 난징 국민정부는 만주의 세력권이 그리 확고하게 자리잡은 상태도 아니었다. 장제스가 정말로 장쉐량에게 만주를 사수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더라도(장제스가 장쉐량의 독자 협상을 금지하고 항전을 지시했다는 점에서 이것 자체가 잘못된 전제지만) 결국 결정은 장쉐량의 몫이었지 장제스가 뭐라고 판단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혁명사관이 국민정부가 군벌들을 통제 못하는 사분오열된 정부라고 비난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앞뒤가 환상적으로 맞지 않는 기묘한 비난이라 하겠다. 한편 장쉐량은 후일 만주사변은 자신의 판단 오류로 인한 참사였다고 일본의 의도를 알았다면 목숨 걸고 싸웠을 것이라면서 대만에서 한탄한 바가 있다. 지금도 이날이면 중국에서 반일 시위가 자주 일어나는 편인데 특히 [[2012년]] [[9월 18일]]을 전후한 반일시위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국유화 문제와 국내의 정치적 혼란까지 겹쳐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