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사변 (문단 편집) ===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경제적 위기 ===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양도 받아 [[간도협약]]으로 만주, 연해주 등에 관한 권리를 포기했었지만, 일본의 대륙에 대한 확장주의는 제국의 태동기부터 존재했다.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번영을 위해선 만주를 식민화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가 있으며, 후에 [[삼국간섭]]으로 무효화되긴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는 등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바가 있었다. 이미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만주 남부 지역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대표되는 일본 자본의 경제적 식민지였다. 한편, [[하얼빈]]을 중심으로 한 만주 북부 지역은 [[러시아 제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주사변의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사회의 [[군국주의]] 물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쟁보상과 할양받은 [[타이완]] 섬의 재개발로 경제를 부흥시켰다.[* 2억 냥 + [[삼국간섭]] 후 랴오둥 반도 반환의 대가로 3천만 냥으로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배였다.] 이후 [[러일전쟁]]에서도 비슷한 콩고물을 기대했지만 정작 자금이 바닥난 건 일본이라 [[포츠머스 조약]]에서 배상금 획득은 없었고 결국 [[히비야 방화 사건|여론은 엉망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전리품인 [[조선]]은 통치를 위한 기초 작업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구조에 인구는 너무 많고 석유나 특산품이라고 내세울 것은 없는데 독립운동은 엄청나게 활발해서 그렇게 가혹하게 쥐어짰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해방까지 적자만 본 식민지였고, 타이완이 사탕수수 산업 덕분에 그나마 유일하게 흑자를 내는 식민지였다. [[제1차 세계 대전]]도 떡고물을 노리고 참전했지만, [[칭다오]] 조차와 기존 독일 영토였던 북태평양의 섬 몇개의 할양에 그쳐 생각보다 소득은 없었다. 중국 시장을 노리고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를 들이밀었다가 중국 민중의 반발로 [[5.4운동]]이 일어나면서 반일감정이 폭발하였고, 미국을 위시한 여타 열강의 개입으로 제5항[*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정치 및 재정 고문 등용, 일본 경찰 유입, 일본으로부터의 강제 무기 수입 등의 내용이 담긴 조약으로 일본 자체에서 대놓고(아예 공식 명칭으로) '희망조항'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나가는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의 조약을 받아들인 [[위안스카이]]조차 이 조항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을 포기했고 결국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완전히 백지화되었다. 그 대신 엄청난 해운업 성장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경제가 부흥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이 경제회복기로 접어들면서 이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민당의 1차 북벌]]로 친일적인 [[중화민국 북양정부|북양정부]]가 무너지고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가 본격적으로 자주외교에 나서면서 더 이상 중국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증가시키기 어려워진데다가 내부적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군부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군축이 진행되면서 군내부, 특히 영관급 장교들의 불만이 축적되어가던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1929년 말 [[대공황]]까지 닥치자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극우 정치권에서 위기탈출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1928년 이를 감지한 [[관동군]] 장교들이 총대를 메고 황고둔에서 [[장쭤린]]을 [[황고둔 사건|죽여버린 것이다]]. 장쭤린은 [[미쓰야 협정]]을 맺고 [[반봉사건]] 당시 관동군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가장 일제에게 협조적인 [[군벌]]이었음에도 그가 장제스에게 두들겨맞고 도로 만주로 쫓겨난데다 일본이 그에게 제시한 만몽신오로협약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간 만주에 뿌려둔 떡밥들이 헛수고가 될 것을 우려한 관동군은 [[1928년]]에 장쭤린을 폭살하고 만주를 무주공산으로 만들어 차지하려 했지만,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은 아버지의 가신이자 자신들의 경쟁자였던 창인화이와 [[양위팅]]을 없애고 [[봉천군벌]]의 자리를 계승한다. 일본은 장쉐량을 압박하여 만주에서의 일본 이권을 보장받으려 했으나 아버지를 잃은 장쉐량은 그말을 무시하고 [[동북역치]]를 통해 장제스 정권에 합류한다. 그렇다고 장쉐량이 급격히 반일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는데, 장쉐량은 일본을 자극하면 만주로 쳐들어올까봐 매우 두려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관동군의 탐욕은 장쉐량이 반일을 하든 친일을 하든 상관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나 관동군의 장쭤린 암살은 천황의 재가도, 내각의 승인도 받지 않은 '''독단행위'''였고 이때까지 완전히 군국주의에 미쳐 돌아가지는 않았던 일본에서 관동군의 만행은 큰 비판을 받았다. 더군다나 국제사회까지 일본을 비판하자 관동군은 장쉐량이 만주를 장악하는 혼란기를 이용하지 못하고 방관해야 했고 대만주 정책은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주도했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만주를 중국에서 완전히 분리해서 친일 괴뢰국으로 만들 심산이었지만 장쉐량이 [[동북역치]]로 일본의 만주 분리정책에 정면으로 빅엿을 먹이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그나마 일본 입장에서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장쉐량이 자신의 기반인 동삼성과 러허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대신에 무리한 관내 진출에만 몰두하였고 만주 내부의 구파와 신파의 정쟁이 심해져서 결국 만주사변에서 허망하게 무너지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 육군대신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를 비롯한 월권행위자들을 애국자란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이는 큰 패착이었다. 이후 관동군 사령관이 [[https://ko.wikipedia.org/wiki/혼조_시게루|혼조 시게루]]로, 참모장이 [[이타가키 세이시로]]로 교체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시와라 간지]]'''가 등장했다. 관동군 작전참모에 임명되어 만주에 도착한 이시와라 간지는 이시와라 간지 문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일본군 내부에서도 매우 독특한 인물에 속했는데, 미래에 동양의 일본과 서양의 미국이 한판 붙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단아였다. 이시와라는 이에 대비하여 만주와 몽골을 점령하자고 노래를 불러댔는데, 그런 그가 만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이시와라는 일본의 만주 병탄이 절대 일본의 사적인 이익이 아닌, 일본·중국·조선 삼국의 인민들이 평화로이 공존하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시와라만이 그렇게 외쳤을 뿐이지 실제론 땅도둑과 폭군들이 군침을 흘릴 뿐이었다. 애초에 이시와라는 강제로 병탄된 피점령지의 주민들이 품을 반감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예전에 그랬다고 해서 지금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는 궤변을 지껄였다. 어쨌거나 그의 막나가는 주장에 대해서 참모본부는 일본의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우려하여 반대를 표명했다. 하지만 이시와라는 참모본부의 반대를 묵살하고 청년장교들을 선동하여 만주 침략의 길에 나서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