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사변 (문단 편집) === [[류탸오후 사건]] === 관동군은 9월 28일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 육군참모총장 [[https://ja.wikipedia.org/wiki/%E9%87%91%E8%B0%B7%E7%AF%84%E4%B8%89|가나야 한조]] 등을 중심으로 하는 육군의 후원 하에 만몽을 침탈하려는 계획을 진행중이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인진 알 수 없으나 강경파 혼조 시게루가 8월 1일 관동군 사령관에,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와라 간지 등이 관동군 요직에 배치되었다. 8월 중순 이타가키 세이로는 육군 군사과장 [[https://ko.wikipedia.org/wiki/나가타_데쓰잔|나가타 데쓰잔]] 대좌, 보임과장 [[오카무라 야스지]] 대좌, 작전과장 [[이마무라 히토시]] 대좌, 작전과장 [[https://ja.wikipedia.org/wiki/%E5%BB%BA%E5%B7%9D%E7%BE%8E%E6%AC%A1|다테카와 요시쓰구]] 소장 등과 회담을 가져 만몽 침탈을 계획했다. 만주로 돌아간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혼조 시게루에게 중국과 충돌하였을 때 중앙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지 독자적으로 행동이 가능한지 문의했고, 혼조 시게루가 군사령관으로서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겠으나 독단전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답변하자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그 계획이란것이 바로 만철을 폭파시킴으로 소동을 일으키고, 관동군사령부 조례 제3조에 의거하여 소동 진압을 위해 관동군을 출동시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쇼와 덴노|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정부]]는 만몽에 대한 일본의 무력대응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1년 6월 4일 히로히토는 미나미 지로 육군대신에게 군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다스릴 것을 주문했고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에게도 따로 중국과 친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이온지 긴모치]] 등도 대중 유화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군부의 폭주 기운이 유지되자 히로히토는 9월 11일 [[미나미 지로]]를 다시 소환하여 나카무라 사건, 만보산 사건 등이 중국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되었으니 [[메이지 덴노|메이지 천황]]이 만든 군대에 문제가 생겨선 안된다고 엄히 지시했고, 사이온지 긴모치도 미나미 지로에게 만몽은 중국 영토인데 외무대신이 아닌 군이 끼어드는 것이 건방지다고 미나미 지로를 질책했다. 이에 처음엔 관동군의 계획을 지지하던 육군 중앙은 생각을 바꾸어 9월 14일 다테카와 요시쓰구 소장을 만주에 파견하여 계획을 저지하기로 했다. 다테카와는 만몽 침탈계획에 찬성하는 인물이었으나 중앙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만주로 향하였는데, 명령에 불만을 품고 비행기 대신에 기차를 타고 느긋하게 출발하였다. 그가 늑장을 부리는 사이, 참모 본부의 러시아 반장 [[https://ko.wikipedia.org/wiki/하시모토_긴고로|하시모토 긴고로]] 중좌는 관동군에 다테카와가 봉천에 도착하기 전에 거사를 해야 한다는 비밀 전문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하시모토의 비밀 전문 3통을 받은 관동군 참모장 등 주요 간부들은 뤼순의 혼조 시게루에게로 달려갔고 봉천에서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와라 간지, [[하나야 타다시]], 헌병 분대장 미타니 기요시, 주재 분대장 이마다 신타로 등이 모였다. 이들은 작전 실행 여부를 놓고 긴 회의를 가졌으나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9월 16일 9시 반부터 이들은 술을 마시면서 다시 회의를 했는데 17일 오전 3시에 이르러서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이렇게 된 바에야 운을 하늘에 맡기고 나무 젓가락을 세워서 정해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즉 점을 쳐서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중지, 왼쪽으로 구르면 결행으로 결정하고 점을 쳤는데 세번 연속으로 굴렸는데 모두 오른쪽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이들은 처음에는 계획을 중지하려고 했...'''었다.''' 이렇게 어영부영 정한 '계획 중지 결정'에 젊은 강경파인 이마다 신타로, 미타니 기요시 등이 반발하여 다시 행동에 옮기자는 주장을 하였고, 18일 오후 7시 다테카와가 도착하자 애주가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다테카와도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기쿠분이란 요정에 데려갔다. 여기서 다테카와가 이타가키에게 설득당했단 말도 있고, 술에 취해 흐느적거렸단 말도 있다. 어쨌거나 다테카와는 이타가키에게 "뒷 일을 자네에게 맡긴다"며 자신은 묵인할 것을 약속했고 이시와라는 혼조 시게루를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는 와중에 관동군은 작전을 열흘 앞당겨 계획에 들어갔다.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20분, 펑톈 외곽 북쪽 7.5km 떨어진 류탸오후[* 오랫동안 류탸오거우(柳條溝, 유조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나 류탸오후(유조호)가 본래 명칭이다. 확실한 원인은 알지 못하지만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의도로 관동군이 일부러 틀린 지명으로 발표했다는 설이 있다.]에서 관동군 독립수비대 2대대 3중대의 공작으로 철도가 폭발했다. 폭파 규모가 매우 영세해 폭발 30분 이후로 특별열차가 시속 80km로 통과할 정도였으나 애초에 명분용이었기에 폭발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만철을 폭파시키고 그걸 동북군의 소행이라고 거짓보고를 올렸다. 이에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가 즉각 혼조 시게루 사령관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그를 사칭하여 독립수비대 2대대와 5대대에게 동북군 7여단을, 2사단 29연대에게 펑톈성(봉천성)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면서 만주사변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술을 마시던 이타가키는 즉각 요정을 뛰쳐나와 11시에 29연대장과 독립수비보병 2대 부장에게 장쉐량 군대가 공격해온다면서 봉천성과 북대궁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사건 보고를 들은 혼조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의무가 있었다고 한 다음에 봉천으로 이동했다. 이때 이시와라 간지와 미야케 고지 참모장은 만주의 장쉐량 군대가 25만을 넘고 봉천에만 2만명을 넘는데 관동군은 1만을 조금 넘는다면서 조선군을 출동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이시와라 간지는 이미 조선군 작전참모 간다 마사타네 소좌와도 이미 조선군의 출동에 대해 조율한 상태였다. 이에 대해 혼조는 대답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한다. 19일 새벽 1시 7분 관동군은 도쿄에 장쉐량이 선빵을 때렸단 거짓보고인 205호 전보를 보냈다. 오후 6시 가나야 참모총장이 불확대방침을 알려오며 쓸데없는 공격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혼조 시게루는 이에 정전할 것을 명령하며 하얼빈을 공격하려는 이시와라 등의 계획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이시와라는 "이제 내 알 바 아니다."라면서 체념했다. 하지만 이타가키는 실망하여 벌렁 드러누은 이시와라에게 하얼빈이 안된다면 길림성을 공격하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했고 이시와라는 다시 힘을 얻어 봉천을 지키기 위해 길림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길림성 진공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즉각 다테카와에게 길림성의 재류 일본인 보호를 구실로 출병할 것을 제안했고 이들을 말리러 온 다테카와는 그 계획에 감탄하여(...) 미야케 참모장과 함께 그들을 지지하게 이르렀다. 이에 막료 전원이 혼조를 설득하여 길림성 출병을 허락받으려 했지만 돌부처란 별명이 있던 혼조 시게루는 요지부동이었다. 12시 쯤에 이시와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시로를 뺀 모든 막료들이 포기했고 곧이어 이시와라도 포기했는데 이타가키는 새벽 3시까지 남아 혼조를 설득한 끝에 그의 승인을 받아냈다. '''이렇게 관동군의 고삐는 완전히 풀려버렸다.''' 한편 장쉐량의 항의를 받고 경악한 일본 총영사가 장쉐량과는 협상을 해야 한다고 만류하자 소좌 하나가 군도를 뽑아 "이 칼이 아무것도 베지 않고 도로 칼집에 들어가는 일이 없을 것이오.[* 해석: '''너 우리 말 듣고 얌전히 있을래? 아니면 내 칼에 목이 달아나 죽을래?''']"라고 위협했는데 그가 바로 [[하나야 타다시]]였다. ~~니가 무슨 야쿠자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