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사변 (문단 편집) === "괘씸하나 어쩔 수 없다" === 더욱 황당한 일은 9월 21일 오후 조선 주둔 혼성 제39여단 소속 1만여명의 병력이 무단으로 압록강을 넘어간 행동을 본 일본 정부의 반응. 후일 "월경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가 명령도 없이 월경을 했으니 이건 군법재판감이었다. 실제로 사건을 알아차린 참모본부 역시 정부의 방침과 경비, 국제분쟁 등의 문제를 들어서 조선군의 월경을 금지하기로 하는 한편 각료회의 소집을 요청하여 9월 22일 오전 10시에 각료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는 만주사변이 육군의 계획된 행동이었다면서 육군을 규탄했다. 미나미 지로는 우물쭈물하며 대응하지 못했는데 이때 조선군의 월경 소식이 각료회의에 밝혀지게 된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반응은 "[[씁 어쩔 수 없지]]." 와카쓰키 수상은 19일에 내각을 소집하여 사태를 확대하지 말라고 관동군과 조선군의 원대복귀를 명령한 바가 있음에도 조선군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단 소식을 듣자 우왕좌왕하면서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이지 못하다가 이런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뭐라고? 이미 만주로 들어갔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예산에서 특별 군사비를 지출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명언이 남게 된 이유는 그 시절 일본 내각 구조와 관련이 있다. 당시 일본의 내각은 대신 하나만 사퇴해도 내각 전체를 해산해야 했기에 강경파 한명이 쿨하게 사퇴하면서 내각을 무력화시키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황고둔 사건]] 당시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초기에는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단독으로 저지른 것"이라면서 쇼와 덴노에게 처벌을 요청했으나 육군의 강력한 반발로 "묻어둘 수 밖에 없다."라고 말을 돌렸다. 쇼와 덴노는 이에 역정을 냈고 "다나카를 더이상 보지 않겠다, 다나카는 아주 싫다." 는 발언까지 하자 결국 7월 2일, 사건이 터진지 한 달만에 다나카 내각은 총사퇴한다. 뒤이어 그의 후원으로 총리가 된 동창 [[야마나시 한조]] [[조선]] [[총독]]도 비리로 물러났다. 이렇게 내각이 단기간에 여러번 무너지자 천황과 궁내대신들은 가급적 군과 내각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려 했던 것이다. 때문에, 내각은 사태 확대를 막아야 한다면서도 강경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중국과 [[소련]]의 눈치를 보면서도 조선군의 압록강 월경 소식에 즉각 특별 예산을 승인해주었다. 와카쓰키 수상은 사후 재가를 내려주면 관동군이 남만주를 점령하는 수준에서 진정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고, 남만주를 먹은 관동군은 더욱 미쳐 날뛰며 북만주를 향해 칼날을 돌리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히로히토는 조선군의 월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다가 와카쓰키 수상이 이미 각료회의의 결정이 난 것이라 하자 재가에 동의했다. 이러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책임 추궁도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그러나 이상의 사정만으로 당시 일본 내각과 천황에게 중국 침략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보는 것은 만주사변 전후의 맥락과 맞지 않는다. 당시 관동군의 월권행위는 명백히 사후 승인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오히려 천황과 일본 정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군부, 특히 [[육군]] 과격파에게 침략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다. 아래에 언급된대로 만주 점령 이후 일본은 일관되게 중국을 식민지화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했으며, 만주 침략에 있어서 관동군의 독단은 그 시기와 방법에 국한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한편, 이때 군부를 제어하지 못한 일본 내각은 결국 [[5.15 사건]]이라는 날벼락을 맞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