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갈 (문단 편집) == 말갈의 명칭과 말갈비칭설 == 기록에서 나오는 말갈의 최초 선조는 [[시황제|진시황]]의 [[진(통일왕조)|진나라]] 이전 기록에 나오는 [[숙신]]이다. 숙신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 종족이고 이들이 [[한나라]] 시대에는 [[읍루]]였으며, [[남북조시대]] [[북위|후위]] 때는 [[물길]], 그리고 [[수나라|수]],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이었다. 이 말갈이 [[발해]]가 멸망하고 [[송나라]] 때부터 [[여진족|여진]]으로 불렸다는 게 정설이다. 다 외부 기록자 중심 명칭으로서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었다. 당대 발음은 [[중고한어]] 기준으로 '모트기트', '마트카트'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의 '기트' 혹은 '카트'는 튀르크계 언어로 '돌'을 뜻하는 단어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건 [[갈족]] 문서로. '말갈은 자칭했던 종족명이 아니라 고구려 중앙에서 도성 중심의 시각으로 [[고구려]]의 변방인들을 멸시해 부른 비칭이기도 했다'고 보는 학설 또한 있다. 말갈이라고 호칭되는 부류에 분명 퉁구스계적 고고학 요소가 우세하고 이것이 어떤 종족을 뜻할 정도의 일체성은 보이지만, 그렇다고 말갈 전체를 전부 퉁구스계로만 퉁치는 것 또한 큰 오류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예맥계적 요소가 두드러져 다른 말갈 부족과는 확연히 다른 [[백산말갈]]과 [[속말말갈]]이 있으니 비칭설을 마냥 일각의 학설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왕조 시대 국가관은 주로 수도 중심으로, 신라 주류층이 경주 외에는 전부 변방촌놈으로 업신여겼듯 고구려 또한 평양 사람 입장에서 동쪽 변방 시골 사람들을 말갈로 낮춰 불렀다는 견해이다. [[한규철]] 교수 등이 지지하는 설이다. 이에 따르면 말갈은 [[촌놈]]과 같은 뜻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시골 사람들을 비하하는 뜻으로 촌놈이라 부르듯, 고구려 시대엔 말갈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본다. 당이 [[발해]]를 말갈이라 하였던 것은 중국 측의 [[신당서]]에 [[고왕|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데, 아주 한참 전 및 동북공정 입장에서는 이 구절을 곧이곧대로만 해석해 대조영의 가문이 말갈'족' 출신이라는 의미로 이해했으나, 실제로는 그가 고구려 속말부[* 송화강 북쪽 지류인 속말수 일대에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일대를 말한다.] 출신이었음을 나타낸다는 해석이 현재로서는 유력하기 때문이다. 결국 속말말갈로 불리는 이들도 고구려인이었고 훗날 발해인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물론 기록에 따르면, 말갈 7부 중 하나인 속말부는 강한 병사가 수천 명이고, 날랜 무사도 많아, 매번 고구려를 노략질하였다고 전하며, 궐계부의 만돌[* 만돌이 죽자 그 동생 돌지계가 연맹을 이끌었다.]을 중심으로 한 속말말갈의 소부 8부는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수나라로 귀순한 사례가 있다. 이 기록들을 보았을 때 [[물길]]-말갈의 독자적인 외교가 기록에 남아있는 이상 '말갈이 촌놈이란 뜻의 비칭이지 이민족을 구분해 부른게 아니라는 주장'에도 오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24사|중국의 역사서]]에서 이민족 열전에는 말갈에 대한 내용을 고구려와 분리하여, 고구려전과 말갈전(혹은 물길전 등)이 따로따로 등장한다. 이는 당시 중원국가들이 고구려와 말갈을 서로 다른 집단으로 인지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양쪽 모두 문제가 있는 이 학설을 어떻게 하면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사서상의 '말갈' 용례를 종합해보면, 전통적인 [[만주|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퉁구스계 부족들을 지칭하는 족명, 초기 백제를 침공했던 집단의 명칭[* 이들을 가짜 말갈이란 뜻의 [[위말갈]]로 부르는데, 말갈로 기록되어 있으나 말갈이 아니라는 해석이 더해진 지칭이다. [[정약용]]은 이들을 말갈이 아닌 예계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위말갈이 위말갈이 아니라 진짜 말갈, 즉 퉁구스계 부족들을 지칭한다는 견해도 있다. 권오중 전 영남대 사학과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낙랑 역사의 전개와 백제》에서 [[낙랑군]]이 말갈에 사주해서 백제를 공격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한국군사사 제1권은 주로 정약용의 견해를 지지하며, 위말갈은 문자 그대로 말갈이 아닌 낙랑, 대방군에 종속된 옛 마한 거수국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중원 국가 및 신라에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부정하기 위해 부른 멸칭 등이 있다. 이는 고고학적 결과로 의문이 풀린다. 부여가 물길, 즉 말갈에게 크게 북방 강역을 상실했을 때 말갈이 대거 부여인들이 살던 지역에 유입되었는데, 흡사 여말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고려인 등이 혼재해 살았듯 부여인 일부는 약간 말갈화되고, 말갈족 일부는 약간 부여화되었으나 크게 섞이지는 않고 잡거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즉 속말말갈 일부는 퉁구스계고, 일부는 대조영 같은 예맥계인 것이다. 고구려에게 반대하고 당나라에게 투항한 속말말갈은 퉁구스계고, 계속 고구려에게 충성하다가 고구려부흥운동에도 참여한 속말말갈은 주로 부여계인 것이다. 게다가 백산말갈 같은 경우는 부분 퉁구스계, 부분 예맥계인 속말말갈의 사례와는 달리 거의 전체가 부여-옥저계임이 의미심장하다. 즉 애초에는 숙신-읍루의 후손인 부류를 말갈로 불렀으나 이 말이 말갈족이 대거 들어온 옛 탁리국 영역이자 부여의 옛 북부 강역에 사는 사람들 전체[* 이러다보니 해당 지역에 그대로 살았던 옛 부여인들 같은 예맥인들까지 말갈로 불리게 되었다.]를 일컫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으며, 이후 장수왕-문자왕 시기를 거치며 고구려가 이 영역 전체를 수복해 역으로 해당 지역에 사는 말갈들 전체를 지배 아래 넣어 흑수말갈 외엔 전체를 고구려 변방민화하게 된다. 이러다보니 말갈이란 변방민을 일컫는데로까지 의미가 확장된 나머지, 아예 말갈족 비중도 낮고 거의 전체가 부여-옥저계였던 백산인들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다만 말갈에 퉁구스계 및 예맥계만 있던 건 아니었다. 극소수지만 [[니브흐]]처럼 고아시아계 또는 비 퉁구스계 민족들도 있었다. 이들 일부는 퉁구스인 말갈에게 동화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