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라티아 (문단 편집) === 말라티아 === [[파일:터키 말라티아 9.jpg|width=800]] 13세기 초엽 [[룸 셀주크]] 하에 세워진 카라반사라이 전투 후 [[다니슈멘드 왕조]], 12세기 말부터 [[룸 셀주크]]의 지배를 받으며 튀르크 인의 도시가 된 말라티아는 [[페르시아]] 계 학자들의 유입으로 학문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 후반부터 이어진 [[몽골제국]] ([[일 칸국]])의 지배 이후 1315년에 [[맘루크 왕조]] 령이 되었으며, 15세기에는 다시 튀르크 토후국인 둘카디르의 지배를 받았고 1516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되었다. 중세의 멜리테네 ~ 말라티아는 본래 유프라테스와 멀지 않은 밧탈가지에 있었는데, 1838년 [[메흐메트 알리]]와 맞서기 위해 남하하던 오스만 군대가 기존 도심에서 월동하자 주민들이 더 남쪽의 아스파주 마을로 이주하며 현재의 말라티아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밧탈가지는 현재까지도 에스키 말라티아, 즉 옛 말라티아로 불린다. [*여담으로 말라티아에서 남하한 오스만 군은 이듬해 6월 네지브 전투에서 패배한다.. 보다못한 서구 열강이 1840년에 개입하며 메흐메트 알리는 아나톨리아 진격을 포기하고 협상에 나선다] 1900년 전후 말라티아는 역경의 시기를 보냈다. 1893년 대지진이 발생하여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300여명이 사망하였다. 동시에 [[콜레라]]가 발병하여 9백여명이 병사하였다. 이후 [[아르메니아 대학살]] (하미디예 학살) 시기에는 일대의 아르메니아인 7천여명이 학살되었다. 1913년 통계에서 말라티아의 주민 구성은 2만 7천의 튀르크인, 3천의 아르메니아인 (그중 8백은 가톨릭교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은 아르메니아인도 1915년 봄, 시리아 방면으로 [[죽음의 행진]]에 처해졌다. 1964년 6월, 말라티아에는 재차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하여 8명이 사망하였다. 암울한 말라티아의 근현대사에서 1931-37년의 철도 건설과 1937년 국부 [[무스타파 케말]]의 방문 정도만이 희망적인 사건이었다. [[2023년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당시 피해가 보고된 지역 중 하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