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레이시아/역사 (문단 편집) === 말레이 반도 === 영국은 19세기 전반에도 말레이 반도의 토착 왕국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해협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1870년 이전까지 토착 국가들 간의 문제에 불간섭 정책을 유지하며 직접 지배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19세기 후반, [[신제국주의]](New Imperialism)의 시대가 되자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의 세력 확장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이 계기가 된 것은 여러 토착 왕국들의 내전과 혼란이었다. [[파항]]은 [[조호르 술탄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반독립적인 라자(Raja Bendahara)가 통치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파항의 라자 툰 알리(Tun Ali, 재위 1806–1857)가 [[리아우링가 술탄국]]의 분리 등으로 인한 조호르의 약화를 틈타 1853년 조호르의 종주권을 거부하고 파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조호르는 이에 당장 파항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1857년 툰 알리가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한 툰 알리의 아들 툰 무타히르(Tun Mutahir, 재위 1858–1863)와 툰 무타히르의 동생 완 아맛(Wan Ahmad)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분쟁은 [[파항 내전]](1857–1863)으로 발전하였고, 인접한 여러 세력은 이해 관계에 따라 두 왕자 중 하나를 지지하였다. 조호르는 툰 무타히르를 지지하였고, [[트렝가누]]와 [[짜끄리 왕조]] 시암은 완 아맛을 지지하였으며 영국 세력은 초기에 양편을 중재하려다 실패하자 툰 무타히르를 지지하였는데, 전개 과정에서 트렝가누가 1862년 파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는 등 전쟁은 격렬하였다. 영국은 전쟁 후반까지 군사적으로 크게 간섭하지 않았으나 외국의 간섭은 견제하여 포함으로 트렝가누의 수도 [[쿠알라트렝가누]]와 쿠알라트렝가누에 정박한 시암 군함을 포격하여 트렝가누군과 시암군을 조금 물러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최종적으로 1863년 툰 무타히르가 사망한 후, 내전은 완 아맛의 승리로 끝나고 완 아맛은 파항의 라자(파항 라자 재위 1863–1881, 이후 파항 술탄[개칭] 재위 1881–1909)가 되었으나, 파항은 국력을 크게 소모하여 피폐해졌다. 완 아맛은 전쟁 도중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였으며, 영국 세력도 결국 완 아맛의 승리와 조호르에 대한 파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페락]] 지역에서는 1861년부터 1874년까지 화인 비밀결사 간에 '[[라룻 전쟁]]'(Larut Wars)이라 불리는 네 차례의 대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나며 페락 술탄과 영국 세력도 이권에 따라 개입하는 혼란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1873–1874년의 제4차 라룻 전쟁은 영국 세력이 개입한 페락 술탄국의 계승 전쟁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1874년, 영국 세력의 동맹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페락 술탄 압둘라 2세(Abdullah II, 재위 1874–1877)가 되었는데, 압둘라 2세는 영국 세력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영국에 페락의 보호국화를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874년, 압둘라 2세가 페락 술탄위를 계승하고 영국인 페락 통감(Resident of Perak)이 페락 궁정에서 술탄의 협조를 받아 자문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팡코르 조약(Pangkor Treaty)이 영국과 페락 간에 체결되어 페락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팡코르 조약은 영국이 본격적으로 말레이 반도 국가들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하는 역사적 기점이 되었다. 페락 일부 지방에서는 영국의 간섭에 반발하여 페락 전쟁(Perak War, 1875–1876)이 발발하였으나 영국군은 어렵지 않게 승리하였다. [[슬랑오르]]에서도 술탄 압둘 사맛(Abdul Samad, 재위 1857–1898) 치세에 내전 '[[클랑 전쟁]]'(Klang War, 1867–1874)이 벌어졌다. 술탄 압둘 사맛은 치세 초기에 내분으로 슬랑오르 영토의 일부만을 통치하고 있었고, 이때 슬랑오르 지역은 술탄 외에도 여러 명의 지방 군벌이 분점하는 형세였다. 이때 술탄위 계승권 경쟁에서 탈락한 데 불만을 품은 압둘 사맛의 종손자 라자 마디(Raja Mahdi)는 더 많은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클랑]] 지역의 통치자 라자 압둘라(Raja Abdullah)와 라자 압둘라를 지지하는 술탄 압둘 사맛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초기에 라자 마디는 성공을 거두어 라자 압둘라의 세력 중심 클랑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도망친 라자 압둘라는 전쟁을 계속하였고, 전쟁은 슬랑오르 지역의 군벌들과 화인 비밀결사가 양편으로 갈려 서로 싸우고 [[파항]]은 라자 압둘라를 지원하는 등 난전이 되었다. 전황은 라자 압둘라 편에서 참전한 두 지휘관, 라자 압둘라의 아들 라자 이스마일(Raja Ismail)과 슬랑오르 술탄가와 결혼으로 맺어진 [[크다]]의 왕자 틍쿠 쿠딘(Tengku Kudin)의 활약으로 반전되었다. 라자 이스마일과 틍쿠 쿠딘은 1870년 클랑을 탈환하는 등 전황을 뒤집고 공세로 전환하였다. 영국은 전쟁 전반에는 중립을 지켰지만, 라자 마디의 편에서 지역 항구를 약탈하던 해적이 영국의 해협 식민지 지역을 공격하였고, 영국은 이에 결국 전쟁에 개입하여 1871년 라자 마디의 당시 세력 중심 쿠알라슬랑오르를 공격해 점령하고 도시를 틍쿠 쿠딘에게 넘겼다. 결과적으로 파항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틍쿠 쿠딘은 전쟁을 1874년까지 승리로 종결지었다.[* 여담으로, 술탄 압둘 사맛 측에서 클랑 전쟁 승리의 일등 공신인 틍쿠 쿠딘은 전쟁이 끝나자 슬랑오르의 부왕으로서 독자 세력을 거느렸지만, 이에 위협을 느낀 슬랑오르 술탄에게 [[토사구팽|팽]]당한다. 여기에는 틍쿠 쿠딘의 책임도 일부 있는데, 전쟁 과정에서 틍쿠 쿠딘이 거느렸던 파항 지원군이 전후 파항으로의 귀환을 거부하고 슬랑오르 영내에 눌러앉으려 했기 때문이다. 틍쿠 쿠딘은 전후 영국인과 슬랑오르인 일부의 지지를 얻기는 했지만, 결국 술탄과 슬랑오르 정부의 냉대에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1876년 슬랑오르를 떠나 크다로 돌아갔고, 이어 1878년 공식적으로 슬랑오르 부왕직도 포기하였다.] 파항 내전, 라룻 전쟁, 클랑 전쟁은 영국 세력이 불간섭 정책을 재고하는 직접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내전이나 계승 분쟁은 아직 중앙집권 체제가 강고하지 못하고 계승권이 잘 정리되지 않은 말레이 문화권[* 말레이 반도, 남부 람풍 지역, 북서부 바탁 지역을 제외한 수마트라, 보르네오 해안 지대]의 국가들에서는 역사적으로 흔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말레이 반도가 안정되지 않은 채 이렇게 격렬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지역에서 영국 세력의 경제적·정치적 이권이 안전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팡코르 조약으로 페락을 보호국화한 직후 슬랑오르에도 개입하여, 술탄 압둘 사맛을 설득해 1875년 슬랑오르에도 영국 통감을 두고 슬랑오르를 보호국화하였다. 영국은 1873년 이권 보호를 위해 [[느그리슴빌란]]의 내전에도 개입하였고, 느그리슴빌란의 여러 지역을 1873년부터 1895년까지 모두 보호령으로 삼았다. 1879년 [[조호르]]에서 내전이 벌어지자 영국은 이번에도 빠르게 개입하여 술탄 편에서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조호르는 즉시 보호국이 되지는 않았으나, 점차 강해지는 영국의 영향력을 받아들여야 했다. 말레이 국가 가운데 파항과 조호르는 1880년대 초까지도 영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성을 유지하였으나, 결국 1885년 조호르도, 1886년 파항도 영국의 보호령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영국 세력은 이처럼 새로 보호령으로 만든 말레이 국가들(파항, 페락, 슬랑오르, 느그리슴빌란)을 묶어서 영국이 연합주를 총괄하는 통감(Resident General)을 두는 식민지 [[말레이 연합주]](Federated Malay States, 1895–1942)을 창설하고 수도를 당시 슬랑오르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두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강한 조호르 지역은 말레이 연합주에 가입하지 않았고, 다른 말레이 보호국들보다 조금 폭넓은 자치를 유지하였다. 조호르의 술탄 아부 바카르(Abu Bakar)는 1895년 4월 14일, 말레이 반도의 토착 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조호르의 [[헌법]](Undang-undang Tubuh Negeri Johor)을 반포하였다. 조호르 헌법은 점차 불붙기 시작하는 말레이 [[민족주의]]와 자치 운동의 구심점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오늘날 서말레이시아 북부의 4개 주([[프를리스]], [[크다]], [[클란탄]], [[트렝가누]])는 19세기에 [[짜끄리 왕조]] 시암의 영향권 하에 있었으며, 이들은 1909년 영국–시암 조약으로 시암의 영향권에서 빠져나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새로 영국령 말라야에 편입된 북부 4개 주는 조호르와 함께 다섯 [[말레이 비연합주]](Unfederated Malay States)를 구성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