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레이시아/역사 (문단 편집) === 파타니 왕국 === 과거 [[랑카수카 왕국]]의 영토에 거주하던 말레이인들이 이슬람화되어 세워진 [[파타니 왕국]](1457?–1902)은 근대까지 이어지는 독특한 문화와 기록 유산을 남겼다. 파타니 왕국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 네 명의 여왕이 통치하는 시대에 경제적, 정치적 전성기를 맞았다. 파타니 왕국은 남하한 [[아유타야 왕국]]의 명목상 종주권을 받아들이며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였으나, 때로 시암의 간섭에 반발하였고 징벌을 위해 파견된 시암 원정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시암과의 전쟁으로 파타니는 국력을 소모하여 네 여왕 가운데 마지막 여왕인 라투 쿠닝의 치세에는 쇠퇴하였으며 이때 파타니의 전성기도 끝났다. 17세기 후반, 파타니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인접한 말레이계 국가 [[클란탄]][* 파타니 지역의 [[빠따니 말레이어|파타니 말레이어]]는 [[클란탄 말레이어]]와 가까운 방언권에 속하며, 파타니와 클란탄의 전통 문화는 상당히 유사하다.]의 침공 및 간섭을 받아 파타니의 왕조가 클란탄 왕조로 교체되었다. 이하는 파타니의 네 여왕 시대에 관해 간략히 서술한다. 16세기 중반 시암의 공격을 받고 술탄이 사망한 후 파타니에서는 약 20년간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1584년, 소년 술탄 바두르(Sultan Bahdur, 재위 1573–1584)가 10세에 즉위한 후로 폭정을 일삼다 이복형제에게 살해당한 후, 바두르의 누나 라투 히자우(Ratu Hijau, '녹색 여왕', 재위 1584–1616)가 새로운 파타니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라투 히자우는 전 술탄 만주르 샤(Sultan Manzur Shah, 재위 1564–1572)의 세 딸 가운데 첫째였다. 라투 히자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파타니의 내정을 안정화하고 시암, 중국, 네덜란드, 영국 등과의 무역과 국내 상업을 크게 진흥하여 파타니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영국 세력 간 경쟁이 벌어져, 라투 히자우 치세에 여왕이 영국인들의 보호를 선언했음에도 네덜란드인들이 파타니의 항구에 정박한 영국 선박을 공격하여 영국인들이 파타니에서 철수하는 일도 있었다. 라투 비루(Ratu Biru, '청색 여왕', 재위 1616–1624)는 만주르 샤의 세 딸 가운데 둘째였다. 파타니의 전성기는 라투 비루 치세에도 계속되었으며, 라투 비루는 군비를 확충하고 시암의 점증하는 위협에 대비하였다. 라투 비루는 클란탄에 파타니와 합칠 것을 권하기도 했다. 라투 웅우(Ratu Ungu, '자색 여왕', 재위 1624–1635)는 만주르 샤의 막내딸이었다. 라투 웅우는 원래 [[파항]]의 술탄 압둘 가푸르 무히우딘 샤(Abdul Ghafur Muhiuddin Shah, 재위 1592–1614)와 결혼하여 파항에 체류하였으나 남편이 사망하자 다시 파타니로 귀환하였다. 라투 웅우는 선대의 두 여왕보다 더욱 시암에 적대적이었으며, 선대의 두 여왕이 유지하던 시암식 칭호를 버리고 '샤 알람'(paduka syah alam), 즉 '세계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채택하여 사실상 파타니의 독립을 선언하고, 나아가 1624–1625년 시암을 침공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라투 웅우는 시암에 맞서기 위해 당대의 유력한 말레이 국가 [[조호르 술탄국]]의 압둘 잘릴 샤 3세(Abdul Jalil Shah III)와 딸을 정략 결혼시켰는데, 이 공주는 원래 시암 남부 [[파탈룽]]의 영주와 결혼하였었다. 부인을 빼앗긴 파탈룽 영주는 아유타야 조정에 파타니의 징벌을 요청하였다. 한편 라투 웅우는 1629년 마침내 시암에 대한 말레이계 세력의 신종의 상징인 [[붕아 마스]](Bunga mas, 금꽃)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파타니가 완전히 시암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 세력임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1632년과 1634년 두 차례에 걸쳐 시암의 징벌 원정군이 파타니를 침공하였으나 파타니는 시암군을 모두 격퇴하였다. 라투 쿠닝(Ratu Kuning, '황색 여왕', 재위 1635–1651?)은 라투 웅우의 딸로 조호르의 압둘 잘릴 샤 3세와 결혼했던 파타니의 공주였다. 라투 웅우가 벌인 시암과의 전쟁으로 파타니의 무역은 큰 타격을 받은 상태였고, 라투 쿠닝의 치세가 시작된 1636년 시암이 파타니에 대한 재침공을 준비하자, 파타니는 결국 시암과 평화 협정을 맺고 형식적인 주종 관계를 회복해야 했다. 라투 쿠닝은 전대의 세 여왕만큼 국내외 정치에서 뛰어난 능력이나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했고, 국내외에서 권신들과 외국 군주에게 끌려다니는 상태를 이어 갔다. 1642년 혹은 1643년, 여왕은 조호르의 압둘 잘릴 샤 3세와 이혼하였다. 1646년, 파타니는 다시 한 번 싱고라([[송클라]]) 등 인근의 시암 봉신국들과 연합하여 아유타야의 지배에 반발하였고, 1649년 싱고라와 함께 [[나콘시탐마랏]]을 공격해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유타야 중앙 정부는 반격하여 봉신국들을 다시 평정하였고, 이로 인해 파타니는 다시금 약화되었다. 라투 쿠닝의 치세 후반부는 사료의 부족으로 불명확한데, 클란탄계 사료에 따르면 클란탄의 군주는 파타니를 침공해 1651년 자신의 인정을 거부하는 파타니의 라투 쿠닝을 폐위하고 자신의 아들을 파타니의 군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료에 따르면 라투 쿠닝이 1670년 혹은 1688년까지 통치하였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7세기 후반, 파타니로 클란탄계 세력이 진입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아직 파타니에서 불안정한 정치적 입지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파타니계 사료와 클란탄계 사료가 많은 부분 상충하고 있어 이 시기 파타니의 역사는 다소 불명확하다. 18세기 파타니에서는 클란탄 왕조의 지배가 굳어졌으나 전성기의 세력을 회복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1767년, 버마의 침공으로 [[아유타야]]가 점령당하고 아유타야 왕국이 멸망하자 파타니는 독립을 선포하고 잠시 독립국이 되었으나, 곧이어 새로 들어선 [[짜끄리 왕조]]의 [[라마 1세]]가 1785년 파타니 지역을 다시 평정하고 시암의 지배력을 확립하였다. 짜끄리 왕조의 시암은 1810년부터 파타니 지역을 일곱 개의 말레이 소왕국(파타니, 르만Reman, 르게Legeh, 농칙Nongchick, 사이부리Saiburi[* 이때의 '사이부리'는 [[크다]]를 지칭하는 옛 시암식 명칭이 아니라 오늘날 빠따니주 동부 사이부리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얄라Yala, 야링Yaring)으로 분할하여 지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