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망탁조의 (문단 편집) === [[사마의]] === 司馬'''懿'''. 사마의 또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여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 직후 승상 직위까지 받았지만 사양하고 태부 자리까지만 올랐고 사마사는 대장군이었다. 사마소는 대장군이었다가 1년만에 진공, 진왕까지 올랐다.]의 대를 지나 결과적으로는 그 손자 [[사마염]]이 황제에 올라 [[위(삼국시대)|조위]]를 무너뜨리고 [[서진|진나라]]를 세웠다. 다만 사마의의 경우 본인은 그냥 권력만 잡았고[* 그것도 사마 가문만이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를 만든 것도 아니였다.] 따로 한 것이 없었으며 실제 권력 독점의 작업은 첫째 아들이, 제위 찬탈의 작업은 둘째 아들이 주도해 행했다는 점이 좀 다르긴 하다. 물론 권력을 잡던 때 그의 나이가 70을 넘긴, 목숨이 오락가락할만한 나이였던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그런데 정작 사마의의 유언은 "나라에 충성하라."였으나 그 자식들이 말 안 들은 것 때문에 끼였으니 좀 억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부러 자식들을 위해 자신은 충성을 바치는 식의 연기를 했다는 의혹도 강하며, 이 부분은 조조도 비슷하게 지적받는 부분이지만 아무도 속지 않은 조조와 달리 사마의는 본심을 추측하기가 힘들다. [[썸(노래)|역적인듯 역적 아닌 역적 같은 자.]] 또한 사마씨는 조조의 일족들을 문초하고 많이 죽였는데 이 과정에서 위(魏)는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잃었다. 내정에 매우 뛰어난 치적과 업적을 달성한 바 있는 [[하후현]]은 끌려가 사형당했고 하후연의 차남이자 조위 차세대 유망주 격인 장수인 [[하후패]]는 [[촉한]]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나마 촉이 암군 유선과 간신 황호에 의해, 그리고 오는 폭군 손호와 간신 손준, 손침, 잠혼 등에 의해 망해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역으로 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마륭]] 같은 유능한 인재를 [[독발수기능]]의 난 진압에 투입한 거야 둘째쳐도 그 뒤 서량에 머물게 하는 등 사마씨들, 그 중에서 특히 사마염은 인재 보는 눈은 몰라도 인재를 쓰는 능력, 그릇은 없었다. 당장 [[문흠|개인적인 감정]]으로 [[문앙|삼국시대 후반부 최강의 무장 중 1명]]을 홀대한 것만 봐도 그렇다. 또 서진 당시의 상황을 보면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들과 황족들이 그야말로 소돔과 고모라 수준으로 놀아재껴 천하는 도탄에 빠졌으며 나라가 폭삭 망하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의 상태였다. 거기에 사마염 사후 서진 말기의 20년간의 상황을 보면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각지의 세력 가진 왕들은 독자적인 군벌로 전락해 이민족 용병들을 활용하며 마음껏 서로의 세력을 깎아먹었고, 기껏 이룬 천하통일은 깨어져 그 절반을 북방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단, 사마염 사후 서진 말기의 20년간 상황은 국정 운용에서 많은 혼란이 있었고 양씨, 가씨 일가가 벌인 행태와 8왕들이 벌인 내전은 꽤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이미 흉노, 선비, 강, 저, 오환으로 대표되는 이민족 집단의 군사적 경험과 사회 체제, 지적 역량은 상당 부분 발전된 상황이었고, [[영가의 난]] 자체는 꽤 우발적인 사태였다고 볼 개연성이 충분하다.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후기 로마 제국 같은 경우 그래도 이민족들은 자기네 구역에서 알아서 놀게끔 면밀한 관리가 이뤄졌고 이민족이라고 하더라도 딱히 군대나 관료 체제 진입, 승진 면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 안전장치가 있었던 반면 위진 제국은 이러한 배려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이미 동한 시기부터 이뤄졌던 추세라 서진과 사마씨 탓만 할 순 없다. 사마염이 경솔하게도, 알짜배기 영토 내에 독자적 세력이 있고 출세길에서도 이방인 수준으로 차별받는 불만 가득한 이민족 무장 세력의 존재는 고려하지 않고 지방 주둔군 규모를 마구 줄이고 가정사 관리에도 신경쓰지 않았던 게 동한~위진 시기부터 축적된 문제를 폭발하게 한 건 사실이었으나 설령 사마염이 이런 부분에서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이민족들에게 제국 절반을 내주는 사태가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진(晉)정권은 국토의 절반을 간수하고, 간수한 위치에서 다시 국력을 보존하고 추슬러 [[환온]], [[유유]] 등이 이민족 국가들을 여럿 멸망시키고 장안과 낙양을 탈환하는데는 성공했음도 감안해야 한다. 사마의를 비롯한 사마씨가 전근대 사회에서 비난받는 것은, 왕망이 개발한 선양이란 쇼를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어 충(忠)이란 개념을 자기 일가 유리할 대로 이용하는 행태였다. 현대인이 보기엔 당연히 속임수에 불과했다. 물론 아예 이런 개념이 없어 로마 시민인 휘하 군인들 지지만 있으면 현임 황제를 죽이고 개나소나 다 황제가 될 수 있는 로마 제국과 비교한다면 보다 정교한 제도였으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 부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뒷날 [[오호십육국시대]]에 [[후조]]의 창업군주 [[석륵]]은 [[고구려]] 사신 우문옥고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신하인 서광과 대화를 하던 중 서광이 "폐하께서는 그 덕이 한고제와 하은주의 삼왕을 능가하니 가히 그 덕이 헌원에 버금가시옵니다!"라고 칭송하자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시에 이미 역적으로 인정되던 왕망과 동탁은 빼고 조조와 사마의를 [[디스]]한 것이다. 물론 석륵은 후조는 물론 오호십육국시대 전체를 통틀어서도 몇 안되는 명군으로 꼽히는 황제이기는 하다. >짐이 만일 한고제와 같은 큰 인물을 만난다면 즉시 고개를 숙이고 절한 뒤 북면하여 신하의 자리에 서서 한신이나 팽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오. 만약 광무제와 같은 인물과 한시대에서 만난다면 중원에서 함께 말을 달리며 천하를 한번 겨루어 볼 것이오. 하지만 그 중원의 사슴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오. 대장부가 일을 꾸미는 데 있어서는 마음이 호탕해서 일월과 같아야 하오. '''짐은 조맹덕 부자([[조조]], [[조비]])나 사마중달 부자([[사마의]], [[사마사]], [[사마소]])처럼 고아나 과부[* 고아는 [[헌제]]와 위의 어린 [[조방|황]][[조모|제]][[조환|들]], 과부는 후한과 위의 태후와 황후들을 말한다.]를 속이며[* 원문은 欺자를 썼는데, 이는 '속이다'는 뜻도 있지만 '업신여기다'는 뜻도 있으며 후자로 해석해도 뜻이 통한다.]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오.''' 심지어는 사마의의 먼 후손인 [[동진]]의 [[명제(동진)|진 명제]]도 [[왕도(동진)|왕도]]에게 사마의 일가의 찬탈 과정에 대해 듣고는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晉)의 제업이 어찌 길고 멀겠는가!” 라며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출처:[[진서|진서(晉書)]] 제기 1권 선제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