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망탁조의 (문단 편집) == 재평가? == [[유교]]에서는 [[충]]([[忠]]) 사상이 매우 중요시되었으나, 근현대 이후 전통 질서가 무너지고 동아시아의 유교 중심 사고방식이 완화되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비판받던 망탁조의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었다. * 왕망의 경우 초기 행적과 이상은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는다. 신나라가 겨우 15년 만에 망해서 [[한서]]와 후한서 등의 정사에서는 얄짤없이 까이고 후한서의 경우 후한 자체가 전한을 멸한 왕망을 토벌하는 것을 정통성으로 보았다고 하는데, 이건 물론 후세인도 참조할 실적이긴 하지만 체제적, 행정적 평가로 봤을 때는 어디까지나 참조 사항이지 평가의 전체로 볼 수는 없는 부분이다. 왕망은 초반에 좋았던 게 문제가 아니라, 정치 인생을 시작할 때부터 폭군으로 단죄되어 죽는 그 순간까지 이상주의자였다. 서한 체제의 가장 큰 문제인 빈부격차, 평민의 지위 하락, 호족층의 대두, 이민족 문제 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은 칭찬해줄만하다. 광무제가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지만 어디까지나 보수적인 개혁이라고 밖엔 볼 수 없으며, 더 철저한 전면적인 개혁으로 보자면 왕망보다 못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호족 세력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도 원인이다.] 다만 왕망이 후세에 실패자로 낙인찍힌 이유는, 왕망에겐 꿈꾸던 이상을 실현할 실무와 행정 능력이 없었던 데다 그걸 조력자를 통해 보완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은 데 있었다. 행정과 실무에 능한 조력자를 발굴해서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통치자의 기본이라도 실현했다면 왕망이 그렇게 실패하진 않았을 것이다. 공민왕은 욕은 많이 먹지만 그래도 신돈을 발굴했었고, 진시황 또한 스스로가 실무에도 많이 간여했으되 이사 같은 인재들을 활용했다. 조조 역시 그 자신이 뛰어난 행정가였지만 동시에 인재들의 조언을 많이 빌렸고 참조했다. 그런데 왕망은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고 관료 집단을 지나치게 불신한 나머지 능력도 안 되면서 중요한 개혁을 함부로 추진하다가 망하게 된 것이다. * 조조와 사마의는 각각 [[위(삼국시대)|조위]]와 [[서진#s-1|서진]]이라는 새 왕조의 창건자로 황제에 추존되었으며, [[역성혁명]] 논리에 자유롭고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하는 현대에 와서는 어쨌든 후대로 이어진 왕조를 건설한 둘을 창업군주로는 평가하는 편이었다. 정치 못하고 실패하면 역적이고 어쨌든 후대로 이어지는 왕조를 건설하면 창업군주가 되는 것. 그래서 현대에는 반란자를 특별히 나쁘게 평하지 않는다. 거기다 [[마오쩌둥]]이 조조를 상당히 좋아하여 중국에서 한때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둘은 닮은 구석이 많았기에 일종의 시대를 초월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조조의 경우 현대적인 기준은 물론이고 당시 기준으로도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악행'''들이 속속 재발굴되며 한동안 불던 재평가에서 다시금 조조는 악당이라는 쪽으로 기울어가는 추세다. 당시에도 '''[[서주 대학살]]'''같은 악행으로 비난받아 [[유비|적대]] [[손권|세력]]을 키우는 꼴이 되었고,[* 그리고 이 서주 대학살만큼은 훗날 삼국지(정사)의 저자인 진수조차 깠을 정도로 당대 위정자에게도 욕먹을 짓거리였다. 당시 시대는 아무래도 백성 한둘쯤 학살해도 고위층 한둘을 죽인 것보다는 낮게 취급되던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까였다는 건 해도 너무했다는 심리를 다들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조위 치하의 위나라의 정국이 그야말로 살기 힘들었다는 점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상당히 각박하고 배려 없는 위나라의 전시 체제 운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걸 사마씨 정권이 아주 약간 풀어주자 민심이 그다지 위나라를 그리워하지 않는 쪽으로 돌아선 것만 봐도 '''백성들이 왜 조위를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보면, 현대인의 기준으론 실패한 정치가인 셈이다. 만약 대통령을 뽑았는데 세금은 미친듯이 물리고 계엄체계로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하면서 처벌은 엄중히 한다면, 대외적으로 얼마나 우리나라가 잘나가는지와 별개로 탄핵감이다. 물론 고대인을 현대인의 시선으로만 평가할 순 없기에 조조는 삼국시대의 영웅이 맞으며, 일단 그가 희대의 천재였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포인트는 조위와 조조가 2천년 가까이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 이것과 정반대가 아래 나오는 유비로, 업적 면에서는 조조에게 현저히 못 미치는 (아무리 부유하고 거대하다지만) 고작 한 주 지배에 그쳤음에도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살기 좋게 했기에 사랑받았다.] 일본 동양사학계의 거장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조조를 [[도조 히데키]]와 같은 악랄한 정치인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참고로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주전충도 긍정적으로 본 인물이다. 둘 다 기존 질서의 파괴자라는 점도 같고 악랄하고 잔인한 면이 많이 있었지만 주전충의 파괴는 장기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기초가 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조조의 파괴는 결국 또 다른 혼란을 낳았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주전충은 조조와는 다르게 일반 백성들에게는 잔인하지 않았다.] 사마씨까지 갈 것도 없이 촉한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촉한]]은 [[유비]]의 선정과 [[제갈량]]의 뛰어난 내정관리를 통해 북벌을 일으키면서도 나라의 질서가 문란해지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비단 사업, 농업 발전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켜 '''촉한이 망한 뒤에도 촉 지역에서 제갈량과 유비는 크게 존경받았다.'''[* 촉한 멸망 약 '''40여년 후''' 그 자리에는 [[성한]]이 들어서는데 성한은 촉한의 신하였던 [[범장생]]을 재상으로 발탁하였으며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를 세우는 등 촉한을 우대했고 촉한의 백성들은 그 시점까지도 강유가 촉한을 재건하지 못하고 죽은걸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촉한이 촉한의 백성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진나라 멸망의 결정적 원인인 이민족 정책에 있어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면모를 보여줘 이민족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손오]] 또한 개척이 미진하던 강남지역을 발전시킨 공이 있으며 잦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에게 세금을 독촉하지 않는 등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단, 마지막 황제인 손호는 조씨 일가나 사마염 이상으로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도 평가가 최악이었다.] 그러나 조위는 사방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 상시 계엄령 상황을 조성하여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으며 이민족과도 전쟁을 벌였다. 때문에 세금을 크게 물리고, 백성들을 고향에서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조조가 이후 민중에게 찍힌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또한 조조 이전 한나라의 실정 및 혼란과는 별개로 한나라는 당시 보기 드물었던 400년 통일 왕조였고 아무리 허울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벼락출세자인 조조가 전근대 사회에서 400년 통일 왕조로서 쌓아왔던 전통과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은 당시 관점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조는 비록 황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황후를 처형하고 황제의 후궁과 후궁이 임신한 황제의 아이까지 죽이는 등 한 황실을 엄청나게 핍박했다. * 사마의의 경우는 본인 대에 찬탈하지 않은 점과 매우 길게 인내한 점 때문에 찬탈자로서의 행보만 놓고 보면 현대에는 취급이 나쁘지 않다. 그러나 요동에서 [[공손연]]을 토벌할 때 벌인 대규모 학살은 현대에도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다. 삶 자체도 위선적인 부분이 너무 많은데다가, 최고 권력자가 된지 2년만에 죽어 통치자로서 업적이 적고, 후손들이 만든 서진은 [[조모(삼국지)|조모]] 시해로 첫 스타트부터 크게 꼬이더니 [[팔왕의 난]] 등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추잡함을 현실에서 겪다가 천하의 절반을 이민족에게 내주고 말았기 때문에 평가가 박해졌다.[* 이게 단순한 결과론이라면 모를까, 서진은 태생부터 망할 요소란 요소는 다 갖췄을 정도로 심했다.] 현대 드라마 [[삼국(드라마)|삼국]]을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조비가 사마의에게 "내가 황제 해도 될까?"라는 식으로 묻자 사마의는 "당신 아버지인 조조는 능력이 있어서 자기 인망까지 깎아가며 황제가 될 필요가 없었지만, '''당신은 권위도, 능력도 아버지보다 떨어지기 때문에 일부러 황제가 될 필요가 있어보인다.'''"와 같은 식으로 대답한다. 이에 결국 조비에게 찬탈당하고 산양공이 되어 배에 오르는 헌제를 부둣가에서 배웅하는 사람이 하필 또 '''사마의'''로 재해석되는데, 헌제가 사마의를 기특하게 바라보는 눈길이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사마의가 조씨를 끝장낼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는 듯한 눈치로 극중에서 그려진다. 여담으로, 이건 훗날 북제가 동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나온 일화를 끌어다 여기서 쓴 것이다. * 마지막 [[동탁]]만은 '''재평가도 없는 확실한 악인'''으로 묘사된다. 그래도 그나마 좋은 점을 찾아보면 젊은 시절 강족무리가 손님으로 찾아오자 전재산이었던 황소를 내어 잔치를 치렀고,[* 전승에 따라 후에 강족들이 감동 받아 수백 마리의 가축으로 보답했다는 후일담이 붙는 경우도 있다.] 부하들을 잘 챙겨주어 부하들이 잘 따랐다는 정사의 기록을 보아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처럼 인간적인 면'만'은 좋은 사람으로 추측된다. 그래도 동탁 관련 이야기를 언급할 때 "동탁도 처음부터 성격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라고 언급하긴 한다.-- 사실 그 조조도 [[여백사]] 사건이나 [[서주대학살]] 전까지만 해도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이었다.-- 물론 동시에 나중에 권력 욕심에 중독되어 타락한 인물이라고 부정적 언급도 쓴다. 즉 옹호라 하긴 힘들고 기껏해야 깔 때 까더라도 제대로 알고 까자 정도. 다만 동탁의 횡포로 인한 의외의 긍정적인 효과가 있기는 했는데, 바로 동한을 좀먹던 환관 집단과 외척 집단,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어 살던 기득권 집단이 동탁 손에 싸그리 정리된 것. 물론 어디까지나 동탁 자신이 그 기득권을 혼자 다 쳐먹으려고 그런 것이고 이 과정에서 죄없는 양민들까지 대거 학살당하고 나라 자체가 유비, 조조, 손권이라는 세 군웅 덕에 수습되기 전까지 쭉 개막장이 되었기에 절대 이걸 가지고 동탁을 칭찬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동탁이 했다기보다는 앞서 벌어진 십상시의 난으로 외척 하진과 하묘, 환관세력들이 동탁이 오기 전에 알아서 공멸한 탓이 크다. 또한 동탁을 견제할 청류파 세력마저 당고의 금으로 힘을 잃은 상태였고 그나마 남은 세력들도 동탁을 피해 외부로 도망친 상황이었기에 동탁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후대의 [[이주영]]이나 [[주전충]]은 아예 본인들이 나서서 기득권 세력을 일소한 권력자로 유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