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매카시즘 (문단 편집) === 매카시즘 열풍 === 1950년 6월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6.25 전쟁]]이 발발하고 같은 해 여름에는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이 발생하면서 매카시의 활동에 제트 엔진을 달아 줬다. 당시 매카시와 HUAC의 활동을 대충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악마의 증명|매카시나 고발자가 간첩이나 공산주의자'''일 것 같은''' 인물을 지목한다.]][br] 2. HUAC는 고발된 사람을 청문회에 소환해 조사한다.[br] 3. 만약 조금이라도 꼬투리를 잡을 만한 의심스러운 증거가 있다면 청문회에서 확증인 것 마냥 쓰여서 공산주의자로 몰아간다.[* 당연하지만 기소 이후 법정에서는 증거로서 인정되지 않거나 인정되더라도 이후 결과가 뒤집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사람을 선동하기는 쉽더라도 선동된 사람들을 다시 되돌리는 건 선동의 주도자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매카시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지금처럼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는 것도 아니였기에 이 시기에 항소해서 여론을 뒤집는다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든 일이였다.] 결국 고발된 인물은 지위나 명예를 잃고 추방되거나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br] 4. 언론은 이를 [[가짜 뉴스|대서특필]]하고 국민들은 공산주의로부터 미국을 지켰다고 환호, 매카시와 고발자는 다른 인물을 지목해 1번부터 반복.|| [[파일:McCarthy060921GettyCROP.gif]] 이런 식으로 HUAC와 매카시가 서로 돕는 무한동력(?)이 돌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혐의로 체포되거나 심문받았으며 유명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매카시가 등장한 이후 첫 1년동안 HUAC의 공개 청문회에 소환된 인물은 214명이었는 데 반해 비공개 청문회에는 395명이 소환되었으며, 녹취록은 공개 5671페이지, 비공개는 8,969페이지에 육박한다. 거의 하루에 1~2명 꼴로 조사하는 것을 반복했다는 의미였다. 이 과정 속에서 할리우드 등의 영화계는 반공주의적 성격의 영화를 찍어내며 자신의 애국심을 증명하려고 노력했고 [[미국 공산당]] 등 사회주의 관련 단체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은 스스로 자신의 활동을 자성하는 수기나 글을 쓰면서 열풍을 피해가려고 노력했다. 이 광풍에 힘입어 매카시는 1952년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하고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자 상원 감사위원회의 위원장이 되면서 더 큰 권한을 얻었다. 그렇다고 당시 미국 정부가 매카시즘을 방관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미국 대통령, 백악관도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는 것이 의회, 상원위원회다. 매카시가 대중적 선동을 통해 동력을 얻고 의회에서 반공의 핵심적인 역할을 장악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는 몰락 과정에서 도드라지게 드러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