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맥주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dn.biblicalarchaeology.org/beer.jpg|width=100%]]}}}|| || [[고대 이집트]]의 맥주 마시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시종이 맥주를 걸러 마시는 사이펀으로 시중을 들고 있다.] || 본격적으로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인 14,000년 전부터, 인류가 수렵생활을 할 때 이미 존재했던 술이다. 이미 그 당시부터 맥주 양조장을 만들어 본격적인 생산을 하였다.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B%A7%A5%EC%A3%BC-%EC%97%AD%EC%82%AC-5000%EB%85%84-%EC%95%9E%EB%8B%B9%EA%B2%BC%EB%8B%A4/|맥주 역사 5000년 앞당겼다..1만3700년 전 양조장 유적 발견]]. [[고대 이집트]]가 처음으로 통일된 제1왕조 시절에는 한 번에 2만 2천 리터 이상의 맥주를 생산할 수 있는 대형 양조장이 등장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10214035851009|#]] 고대 [[바빌로니아]]와 [[고대 이집트]]에서도 맥주에 대한 기록이 존재해서(물론 지금의 맥주와는 다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술이다. 특히 고대 이집트의 맥주는 알파벳 표기로 Zythum 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서 효모를 뜻하는 Zymogen, 또한 Zymo-(효모의)라고 하는 접합어가 나왔을 정도로 이미 [[고대 이집트]]에서는 누룩을 발효시킨 맥주가 존재했다.[* 고대 이집트에는 맥주 바(bar)가 있었으며 바텐더는 모두 여성이었다고 한다.][* 중왕국 시대 이후를 기준으로 하자면 맥주의 표기는 hnkt이다.] 당시의 맥주는 곡물을 그대로 발효시켜 낸 그 자체를 마시는 것으로, 현대의 주종을 이루는 맑은 액체인 라거 맥주가 아닌 [[죽]]과 같은 걸쭉한 형태로서 효소로 분해된 각종 비타민과 아미노산이 풍부하여 한 끼 식사의 대용품으로도 충분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시대의 맥주란 보리로 [[빵]]을 구워서 그것을 물에 부수어 풀거나 보리[[죽]]을 쑤어서 1m가 안 되는 크기의 항아리에 부어 차가운 벽면 아래서 자연 발효시켜 윗술을 마시는 알코올화한 [[죽]]. 현재의 맑은 맥주를 생각하면 안 된다. 불순물이 많아 벽화를 보면 맥주 통에 거름망을 단 갈대, 혹은 금속이나 목재로 만들어진 구부러진 빨대를 발효된 죽에 꽂아 걸러져 나온 맥주를 빨면서 부채로 파리를 쫓으며 얘기를 나누는 게 묘사되어 있고, 실제 맥주용 빨대의 유물들도 출토된 바 있다. 이러한 문화는 이집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곧바로 [[그리스]]를 포함한 주변국으로 퍼지기는 했으나 원재료가 풍부하고 제작도 훨씬 손쉬웠던 포도주[* 참고로 이 당시의 포도주도 맥주처럼 알콜발효된 포도 시럽이나 다름없는 매우 걸쭉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물에 희석해서 마셔야 했다.]의 위세에 밀려 크게 대중화되지는 않았다. 보리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당시 보리는 가축에게 고효율 사료로 급여할 목적으로 재배했을 뿐이다. 맥주는 주 원료가 밀이나 보리로서 식량작물이기 때문에 잉여 생산량이 많지 않았던 고대에는 식사의 일부로서 취급되었다. 당시에는 향신료인 [[홉]]을 넣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과의 맛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며, 제조과정이 [[포도주]]에 비해 복잡하고 생산량 또한 많지 않아 금세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하지만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있었던 [[갈리아]] 지방(현 [[프랑스]])에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만들던 것과 동일하게 밀 농사가 잘 되어 밀로 구운 빵을 개어 물에 넣고 발효시킨 세르비시아(Cervisia. 또는 세르베시아 Cervesia)를 전통 양조주로 많이 만들고 또 소비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원시적 형태의 맥주의 제법의 명맥을 이어감으로써 맥주의 발전에 한 축을 담당했다. 이 때문인지, 프랑스는 이웃 독일보다 맥주가 대세가 아님에도 자신들이 현대 맥주의 탄생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지금도 이러한 빵을 이용한 방식은 [[크바스]]라는 이름으로 계속 내려오고 있다. 13세기, 감브리누스(Gambrinus)라는 인물에 의해 맥주가 [[게르만족]]에 전파되었다는 전설[* 감브리누스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없고, 훗날 맥주가 양조주의 대세가 되자 그럴 듯한 신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만든 가공의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쨌든 감브리누스는 지금도 맥덕들의 수호신처럼 여겨지고 있고, [[체코]]에서는 필스너 맥주 중 감브리누스라는 상표의 제품도 나오고 있다.]과 16세기의 초기 독일에서 [[바이에른]]공 [[빌헬름 4세]]의 맥주 순수령이 나타났던 기록에서 맥주의 문화는 [[유럽]]권으로 전파되어 독자적으로 성장해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맥주순수령은 그동안 각기 각색으로 다양하게 존재하던 맥주의 제조법을 통일하여 규격화하고자 하여 맥주의 제조에는 물, 보리, 홉을 제외한 다른 원료의 첨가를 금지했다.[* [[독일]]에서는 아직도 순수령을 중시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 사실 독일 맥주 순수령은 후대에 미사여구로 포장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교회와 영주 사이의 이득 갈등, 제빵업자와의 곡물 가격 갈등 등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공포된 것이었다. 순수령 공포 이후에도 당시 귀족층이 즐겨마신 밀맥주는 여전히 양조하는 등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면이라든가, 서민층이 마시던 맥주의 다양성을 줄이는 등의 부작용도 있었다. 하지만 이 순수령이 독성 성분을 포함한 그루트의 사용을 억제하는 등의 좋은 효과를 가져온 것 또한 사실이다. 당시 홉(Hop)은 식물성 원료로서 맥주에 독특한 풍미를 유지하는 동시에 맥주의 부패를 방지하므로 역대 맥주순수령이 내려진 직후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첨가되어 있다. 여담이지만 그 당시 [[수메르]]의 주조자와 [[바텐더]]는 전부 [[여자]]였다고 한다. 맥주 주조와 바텐딩은 중세나 근대까지 여성이 자기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영국만 해도 에일 맥주 주조는 대개 여성이 했고 술을 파는 것도 여성이 많이 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맥주를 식사와 함께 거의 항상 마셨다.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맥주는 확실히 매우 대중적인 음료였다. 봉급의 일부에 맥주가 포함되기도 했으며, 노동자에게 제공하는 식사에도 거의 항상 맥주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왜 맥주를 그렇게 많이 마셨는지는 후술하듯이 논쟁에 휩싸여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관련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 단지 추측할 뿐이다. 이 부분은 주관에 따라 자주 수정되므로 모든 의견을 나열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물론 우리가 지금 마시고 생각하는 그 맥주가 아닌 다른 맥주이지만, 재료가 [[보리]]라서 보리술, 맥주(麥酒)로 이름이 같았다. [[영조실록]]에서도 맥주를 만들어 마시니 술 제조를 금한다고(흉년이라서) 기록되어있다. 이 맥주가 대체 어떤 맛인지 [[산가요록]]에 제조법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물론 현대의 맥주와는 다른 보리로 빚은 청주에 가까운 물건이다. 현대의 맥주는 19세기 [[구한말]] 때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 함께 유입된 것을 최초로 추정한다. 물론 [[일제강점기]] 때까지 맥주는 상류층들이나 마시는 극소수의 사치품이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맥주를 생산하게 된 것은 [[1933년]] 일본 자본이 설립한 '조선맥주'와 '소화기린맥주'[* 소화는 당시의 일본 연호인 [[쇼와]](昭和)를 한국(조선)식으로 읽은 것이다. '기린'은 [[기린(상상의 동물)|상상의 동물 기린]]을 뜻한다.]가 생산하면서부터이다. 두 회사는 [[8.15 광복]] 후, [[미군정]]이 관리하다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조선맥주'는 크라운맥주로, 소화기린맥주는 동양맥주가 되었다. 이것이 각각 후대의 [[하이트맥주]]와 [[OB맥주]]로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