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맨앳암즈 (문단 편집) == 역사 == 중세 초기의 [[기사(역사)|기사]]는 신분이 아닌 직업 개념이었으므로 잘 무장한 전문 직업군인이면 그냥 기사라고 불렀고, 이름이 알려진 기사들에게 '동업자'로 인정받는지의 여부가 그나마 존재한 검증 수단이었지만[* 웬만한 전근대 사회가 그렇듯, 이 시기에는 참전하려는 자는 군마와 갑옷, 무기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데다가 이를 사용하는 전투기술을 배우는 것 역시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중세 초기의 기사들은 말석이나마 [[지주]]계층이거나 최소한 가솔로서 그들한테 신세를 지는 처지였다. 후대와는 달리 기사가 신분 개념이 아니고 이를 인정하는 '서임'에도 별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시대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장 기사(군인)가 많이 필요한 시대였다. 그 신분이 영세한 자유민이나 심지어 농노 혹은 노예라 해도, 군마와 갑옷, 무기라는 조건을 채운 자가 기사를 자칭하거든 신분 사칭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었을 뿐이었다.] 차츰 기사가 병과([[중기병]])로서의 개념이 약화되고 사회적 계급 개념으로 변모하면서 하급 귀족으로 편입되어 [[12세기]] 경에는 과거와 달리 정식 서임을 받지 않았으면 기사라고 불리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군사적으로는 전쟁 수행 방식이나 전술, 장비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화로 왕의 사법권과 행정권이 확대되면서 기사들이 이전까지는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다양한 행정직에 임명되어 지방 사법행정의 주역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사회경제적으로는 농업생산력이 늘어나고 상업과 교역의 증가로 화폐 경제가 발달해나간 영향으로, [[자유도시|도시]][[코뮌|공동체]]가 군주들에게 더 많은 재원을 제공하고 군역의 금납화와 용병업의 활성화도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여전히 중기병이 중요한 전력이었으며 기사에게도 군역이 부과되었으나, 기사의 수는 줄었으면서도 전쟁의 규모는 오히려 커졌다. 기사가 신분이 되면서 주어진 여러 과업을 완수하고 변화하는 전장 환경에 부응하기 위해 더 많은 경제적 부담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잉글랜드 왕국]]의 경우, 과거 '중무장 기병'으로서의 기사는 연 5~10파운드의 수입으로도 충분했으나, '지역 유지이자 왕의 관료이자 전문군인이자 치안 책임자'인 13세기 기사에게는 적어도 연 20~40파운드가 필요했다. 13세기 초 잉글랜드에서 각종 행정 기록으로써 유추할 수 있는 '기사'의 수는 4,000명에 달했으나, 이러한 일련의 '구조 조정'이 진행되면서 13세기 말에는 1,200명 이하로 떨어졌다. 잉글랜드 기사의 2/3가 증발한 것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는 중하층 기사에 속했을 인원들이 더는 기사라고 불리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의 자세한 전개는 [[봉건제]]와 [[기사(역사)]] 문서를 참고할 것.] 그리하여 유럽 각국 군주들은 전통적인 봉건계약으로 소집하는 기사대에 의존하기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써서 중기병대를 동원하기 시작하였으며, 기사의 수가 줄어들었으므로 기사들이 채우지 못하는 부족분은 평민 중기병을 더 고용하여 해결하였다. 이렇게 신분을 막론하고 전업 중기병으로 활동하는 인원이 늘어나면서 이들 모두를 일컫는 단어로 무장병(man at arms), 즉 맨앳암즈가 사용되었다.[* 다만 16세기 이전에는 맨 오브 암즈(Man of arms)라고 불렀다.] 맨앳암즈는 중세 후기까지 유럽 내에서 핵심 병과였으나, 화기 발달과 함께 갑옷의 효용성이 사라져 전통적 중기병이 쇠퇴하면서 16세기 경에는 [[총기병]]이나 [[창기병]], [[검기병]]을 비롯한 [[근대]]적 기병 병과들로 대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