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이와쿠 (문단 편집)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메이와쿠/Example.jpg|width=100%]]}}}|| || '''{{{#!html 他人にめいわくをかけないようにしましょう}}}'''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합시다.''' ---- 일본의 한 [[https://www.youtube.com/watch?v=nItqAc7mz8U|공익광고]]에서 나온 표어이다. || 메이와쿠(迷惑)는 [[일본/문화|일본 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폐해 그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한국어의 [[폐(동음이의어)#s-2.2|폐]]나 [[누#s-2.1]]와 거의 대응된다.] 또한 일본에는 이 메이와쿠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존재한다. 메이와쿠의 어원이 되는 한자어는 '어떤 것에 홀려 마음이 흐트러지다'는 뜻의 '미혹'으로, 본래는 '남에게 번뇌를 일으켜 마음을 소란하게 하다'나 '번뇌로 마음이 소란하다'를 뜻하는 [[불교]] 용어였다. [[만요슈]]에서부터 그 용례가 확인되며, 불교 경전에서는 산스크리트어 muhyati(흐리멍텅함), sammoha(혼동하여 어리석음), bhranti(전도된 앎)[* 이 단어는 妄法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더 많다.] 등의 개념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埴安乃 池之堤之 隠沼乃 去方乎不知 舎人者'''迷惑'''[* 여기서 이 부분은 '메이와쿠'가 아니라 '마도우(혼란스럽다, まどふ)'라고 훈독한다.] >하니야스 연못 제방의 숨겨진 늪, 어디로 흘러가면 좋을지 모른 채, 시종(토네리)은 당황하노라. >---- >《만엽집》 제2권, 카키노모토노 아손 히토마로(柿本朝臣人麻呂) 작 201번 단가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기존의 불교 용어에 가까운 의미로 쓰이는 다른 동아시아권 국가들과 달리 일본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폐를 의미하는 단어로 변화하였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번뇌를 해탈하는 것은 특히 [[말법]] 시대에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보았던[* [[상좌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 후 5천 년 간은 지관법과 같은 불교 수행의 효용이 있다고 보지만, [[대승 불교]]권에서는 '현세는 이미 [[말법]] 시대이며 석가여래가 아함부 경전에서 가르치신 기존의 수행법은 효용이 없다'는 인식이 이미 기원후 5-6세기 무렵부터 중국 불교권에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말법 사상은 [[정토종]]을 비롯한 일본 불교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불교권의 영향이 변수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남에게 번뇌를 일으킬 짓을 하지 말자'''는 식으로 의미 변질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먼 옛부터 지금까지 헤매어 오던 고뇌의 고향을 버리기 어렵고 또 태어나 보지도 않는 것은 참말로 어디까지나 번뇌의 심한 뿌리가 강하고 단단하기 때문인 것이다. [...] >거기에 또 '논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여러 가지 번뇌가 일어난다. 진실로 지혜 있는 자는 다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라고 하는 확실한 가르침의 말씀도 있는 것이다. [...] >대체로 이 인생에 있어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번뇌와 악의 방해를 끊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기 때문에 진언이나 법화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성승조차도 이생애가 끝이 나면 다음에는 정토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열기를 비는 것이다. >---- >유이엔, 《탄이초》 그러나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어떤 언행이 남에게 번뇌를 일으킬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보니, 이로 인해 타인의 심기를 상하게 할 잠재력이 있는 온갖 행동들이 사회적으로 기피 후보가 될 수 있었다. 근대화 이전의 일본에서는 그 적용 범위가 이웃이나 마을 정도로 적은 편이었고, 메이와쿠를 끼치지 말라는 전일본적 분위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곤란함을 느끼는 본인이 완곡하게 불편을 표하는 용도로 '메이와쿠'를 입에 담는 경우는 많이 있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개념 자체는 전세계 여느 공동체에서나 있는 보편적 개념이지만, 그 중에서도 메이와쿠 문화는 다소 독특한 양상을 보이는 일본식 문화이다. 메이와쿠는 남에게 끼치는 피해 그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을 미리 헤아리지 못하고 상호 간 갈등의 불씨가 될 만한 언행을 의미하는 단어로 확장되었다. 때문에 일본어 '메이와쿠'를 번역할 경우 영어로 'nuisance'라 쓰고는 있으나 사실 이보다는 메이와쿠의 범위가 더 넓고 복잡하다. 그나마 한국의 민폐가 일본의 메이와쿠와 가장 비슷하다고 여겨지나,[* 한국의 경우 지리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일본과 비슷한 배경들이 존재하며, 구한말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100여년 간 비지니스 매너를 필두로 매너 및 준법 문화에서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현대에도 일본과 문화적/인적 교류가 활발해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많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중세와 근대 한국어에서 많이 쓰이던 폐/누를 대신해 민폐가 현대 한국어에서 많이 쓰이게 된 계기로 일본어이자 일본 문화인 메이와쿠를 번안한 어휘이자 문화가 민폐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이다.] 한국의 민폐와 일본의 메이와쿠 사이에도 중요한 차이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벽한 번역은 아니다. 이와모토 미치야(岩本通弥) 교수의 경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제국 정부와 교육 당국에서 서양식 공중 도덕 및 준법([[에티켓]] 혹은 [[매너]]) 문화를 제국의 국민들에게 이해시키고 가르치기 위해 메이와쿠의 의미를 변용해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현대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의 본격적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를 현대적 메이와쿠 문화의 등장 배경으로 본다.[[https://www.todaishimbun.org/words_political_nature20190218|#]] 즉, 최초에는 단어의 원래 의미에 가깝게 개인의 번뇌라는 의미로 썼다가 중세기에 접어들며 이를 넘어 이웃과 같은 가까운 지역 사회 구성원들에게 끼치는 폐의 의미로 확장됐으며, 에도시대에 상업 문화와 도시 문화가 발달하며 점차 변하다가 메이지 시대를 거쳐 다이쇼 시대에 이르는 1910년대~1920년대부터는 서서히 '공중 도덕 위반'으로까지 뜻을 확장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20세기에 접어들며 메이와쿠가 상당히 변화했는데, 이와모토 교수의 분석처럼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의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일본제국의 엘리트들은 서방 국가들로부터 여러가지 유무형의 것들을 도입해 일본제국 내에 퍼트렸는데, 그중에는 서유럽 선진국들, 특히 영국의 신사도와 매너 그리고 준법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영국과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일본의 상황에서는 영국식의 문화를 그대로 이식할 수 없었다. 때문에 '메이와쿠'라는 기존 일본의 불교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을 매개체 삼아서 번역 및 설명했으며, 이를 교육과정을 통해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이것이 집단주의적 면모가 강했던 메이지 시대의 교육 및 사회문화의 배경과 결합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기존 영국의 매너 및 준법 문화보다도 더 광범위하고 복잡해졌다. 즉, 영국의 매너 문화가 특히 당대 일본의 공동체주의/집단주의적 사회문화 배경 및 집약적이고 압축적인 성장을 추구하던 당대 일본 사회경제의 배경과 결합하며 현대 일본 메이와쿠 문화의 기원이 된 것이다.[*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대만, 홍콩, 싱가포르도 이런 연유로 메이와쿠와 유사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이런 메이와쿠 문화가 가지는 긍정적인 면모와 부정적인 면모가 있는데, 긍정적인 면모으로는 사회의 평화와 균형의 유지가 용이하고 각 개인이 알아서 규칙을 지키기 때문에 규칙을 이행시키기 위한 강제적 조치의 발동으로 인한 비용이나 혹은 규칙 미이행으로 인한 비용 소모가 적어진다는 것이다. 부정적 면모로는 사회적 갈등이 제때 제때 해소되지 못하고 쌓이다 문제가 커질 위험과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개성의 표출이 어려워진다는 것이 있다. 이런 메이와쿠 문화로 인해 일본 사회는 사회적 안정성이 높지만 반대급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누적되어 있는 사회적 불만도 상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메이와쿠 문화는 일본적 개인주의의 근원이기도 한데, 서구에서의 개인주의는 프라이버시를 "상대방에게 침해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확보"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반면, 일본의 개인주의는 프라이버시를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나만의 공간의 확보"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발생했다. 즉 서구에서는 사회와 다른 개인으로부터 침해받지 않아야할 권리를 우선시하여 개인을 인식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사회와 다른 개인을 침해하지 않아야할 의무를 우선시하여 개인을 인식한다. 때문에 서구에서는 어떤 제약과 환경에서도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사회적 관계와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의 범위 안에서의 권리를 추구한다. 이처럼 일본의 개인주의는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다른 양태를 보인다. 때문에 서구의 개인주의는 외부적 요인에 얽매이지 않는 각 개인들 사이의 대화와 토론 그리고 상호 간의 투쟁과 타협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둔 열려있는 개인주의라면, 일본의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속한 각 개인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며 서로를 침해하지 않는 닫혀있는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인들은 본심([[혼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연 중에 자신을 표현하거나 갈등을 회피하는 성향이 강하고([[다테마에]]), 이런 공동체적 혹은 사회적 삶과 분리된 사적인 장소를 소중히 여기며 그 안에서의 취미 활동 등 사적인 활동을 즐기는 경향이 강하다. 때문에 [[오타쿠]] 문화나 [[히키코모리]]와 같은 사회적 문제가 일본에서 가장 먼저 불거진 것 역시 일본인들이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보다 타인과 교류할 일이 거의 없는, 본인의 집이나 방과 같은 사적인 장소에서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킨 상태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도 이러한 일본인들의 특성들을 잘 알기에 식당들에는 일인석을 충분히 갖춰놓는 경우가 많고, [[캡슐호텔]]이나 인터넷 카페와 같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자신만의 공간을 제공하는 등의 일본적 개인주의에 맞춘 서비스들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21세기 들어 홍콩, 한국, 대만 등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물론 서구권에서도 청년들을 중심으로 [[오타쿠]], [[히키코모리]] 등의 현상이 등장 및 심화되며 사회적 관계에 대한 피로와 이에 대한 회피로서 개인적 공간에 대한 몰두와 집착 현상이 비단 일본만이 아닌 선진국들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부분이 있으며, 현대 제1세계 선진국들의 정치와 경제가 이런 부분에 대한 대응에 실패했다는 지적들이 등장하고 있다.[[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022/11/26/HJ7OZCXQ3NG63DWK5O6GCUOLCY/|#]] 즉,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을 상정한 서구에서도 결국 이는 이상적 상태에 대한 상정이고, 현실적으로는 일본이나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공동체주의적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인해 일본 사회에서 메이와쿠를 끼쳐 사회적 균형과 평온을 깰 경우에 대한 대응은 직접적인 폭력의 행사보다는 따돌림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에서는 직접적인 폭력의 행사가 좀 더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때문에 학교폭력에 대한 인식도 일반적으로 일본에서는 언어적 폭력과 무리에 끼워주지 않는 따돌림으로 인식되는 반면, 미국과 러시아에서는 집단 폭행 등 육체적 폭력이 동반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는 [[스웨덴]]에 존재하는 [[얀테의 법칙]] 등과도 유사하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가짐인 기쿠바리(気配)나 본심을 숨기고 최대한 융통성있게 돌려말하거나 행동하는 [[다테마에]](建前)도 상대방의 기분을 해치지 않고자 하기 위한 언행들이다. 일본에서 이런 종류의 문화가 발달한 이유로는 일차적으로는 유교적 예 개념 등으로 사회적/공동체적 관계와 그 속에서의 화합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적 경향이 일본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되며, 전근대의 기술로는 벗어나기 힘들며 단합하지 않으면 서로 싸우다 모두가 죽게될 수 있는 고립되어 있는 섬이라는 지리적 요인과 태풍, 지진 등 자연재해에 맞서 생존을 위해 공동체가 단합해야 했던 일본 열도의 환경적 요인이이 영향을 주어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도 강하게 이런 경향이 드러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런 메이아쿠 문화와 관련된 일본 특유의 토론 문화가 바로 네마와시(根回し)다. 원래 사전적인 뜻은 '나무를 옮겨 심기 전 뿌리를 둥글게 다듬다'라는 뜻인데, 정부기관이나 기업 등에서 본격적인 토론 혹은 협상 전의 사전교섭, 물밑작업을 뜻하는 속어로 쓰인다. 회의나 토론 전 상급자가 하급자들에게 자세한 내용이 무엇인지, 상대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지 등을 미리 알려서 이견(異見)과 불편한 감정이 유발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흑선내항과 메이지 유신으로 상인들이 사회 주도권을 잡기 이전의 전근대 일본은 [[막부]] 체제로 대표되는 [[무신정권]]의 습성을 주로 띄고 있었으며 고관대작부터 말단 실무직 관료에 이르기까지 지배계급을 무사들이 독점하는 사회였다. 무사들은 시비가 붙으면 언제나 칼을 빼들고 서로를 해칠 수 있었고, 이는 내가 저 사람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무사들 간에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만약 상대방을 배어 살아남더라도 이는 곧 가문 간 전쟁으로 이어져 더 큰 참화를 야기할 수 있었다. 때문에 무사들끼리 가급적 충돌을 피하는 문화가 강하게 조성되었고, 이런 무사들의 문화가 일본 사회 전반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평민들의 경우 무기를 들고 있고 그 무기를 자신들을 향해 휘두를 권리가 있는 무사들을 두려워하며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하였고, 반대로 무사들은 평민을 밸 경우 따라오는, 심지어는 할복으로까지도 이어질 수도 있는, 여러 제재들을 두려워하여 평민들과 직접 마주치는 상황이나 평민들이 자신에게 반발하며 시비를 걸게 되는 상황을 가급적 피하려 했다.[* 막부 시기에 무사들에게 반항하는 평민을 그 자리에서 배어버릴 수 있는 명목상의 권한이 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에도 막부 시기가 되면 해당 권리를 발동한 무사에게 자신이 살해한 평민이 진짜로 자신에게 반항했음을 입증할 책임이 생겼고, 만약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사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고 여겨 여러가지 제재를 받거나 심지어 할복을 요구받아 할복해야 했다. 또한 어떻게 입증한다고 하더라도 ”괜히 그런 자리에 가서 시비나 걸려 사람 잡은 놈“이라거나 ”자기 감정 하나 제대로 통제 못해서 사람을 죽인 놈“이라는 딱지가 붙어 무사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에도 막부 시기 무사들은 평민과 시비가 붙더라도 본인이 직접 배는 대신 하인들이 그 평민을 적당히 두들겨 패 손봐주도록 하거나 아예 시비가 붙는 상황 자체를 피하려고 평민들이 많은 곳을 피했다. 때문에 현재의 역사학계에서는 에도 막부 시기가 되면 무사의 평민에 대한 즉결처형권은 명목상으로만 남고 실제 실행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져 사실상 사문화됐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평등한 관계와 상하관계 모두에서 가급적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일본식 예절 문화와 언어 문화가 형성되었다. 또한 상인들이 평민화된 하급 무사 계급 출신의 군인들과 결합하여 메이지 유신으로 사회의 독점적 지배층인 사무라이들을 실권이 없는 화족으로 몰아낸 이후부터 상인들의 비즈니스 문화와 언어가 일본의 문화와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군인과 화족이 모두 몰락하고, 냉전 시기를 거치며 상공인들의 주도로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루게 되자 이들 상공인들이 사회와 문화 전 영역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상공인들의 비즈니스 문화와 언어가 일본의 문화와 언어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때문에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도 상공인들의 상업주의적 그리고 실리주의적 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강하게 받고 있고, 이걸 간과하면 19세기 및 20세기 초중반과는 또 다른 20세기 말 및 21세기의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 영국과도 비교할 수 있는데, 영국의 경우 귀족들이 법적 계급으로 남아 있고 사회의 독점적 지배 계급이었던 것을 존중 받아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그리고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정치적 실권은 상실하였다. 현대에 영국 귀족들은 대부분 물려받은 재산을 투자하여 나온 수익으로 호의호식하며 별다른 직업 없이 소일거리를 하면서 지내고 있다. 이렇게 실권을 상실한 귀족들을 대신하여 상공인들이 사회 주도층이 되었고, 근현대 영국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언어는 이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