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카 (문단 편집) ==== 오스만령 히자즈 ==== 메흐메드 알리는 1840년 [[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오스만 제국]]에 패배한 후 히자즈에서 물러났다. 그 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오스만 제국은 1872년 일대에 대한 장악력 확대를 위해 히자즈 빌라예트를 세웠다. 메카는 파샤가 머무르는 주도가 되었고[* 여름에는 고지대인 타이프에 거처.], 기존의 총독부이던 제다와 메디나는 그에 부속된 산작 베이의 치소가 되었다. 오스만 조정은 새로운 샤리프가 즉위함과 동시에 그 후계자를 선정, 후자를 이스탄불로 데려와 와지르 직위를 내려 국무회의에 참석시키는 등 제국에 대한 귀속감을 육성시켰다. 그에 따라 1877년 샤리프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동생 후세인이 계승하자 다른 동생 아운 알 라피크는 [[이스탄불]]로 향하여 후계자 과정을 밟았다. 그러던 1880년 6월 후세인 이븐 무함마드가 암살 당하였는데, 그가 영국과 공모해 '칼리파국에 대항하는 아랍 정권'을 세우려 했다고 의심한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예정된 후계자 아운 알 라피크 대신 폐위된 후 20여 년간 이스탄불에 연금되어 있던 연로한 압둘 무탈립 이븐 갈립을 재차 복위시켰다. 24년만에 아운 가문이 아닌 샤리프를 임명함으로써 압둘 하미드는 그들을 경계하고 히자즈에 대한 제국의 장악력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운 가문과 친분을 쌓아가던 영국은 이에 반발하였고, 그 외교관들은 압둘 무탈립의 임명을 막고자 하였다. 일례로 제다의 영국 영사 제임스 조흐랍은 상부에 '와하비 분파이고 기독교도와 외국인을 혐오하는' 압둘 무탈립 대신 '계몽된' 아운 알 라피크를 지지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영국의 이스탄불 대사 오스틴 헨리 레야드가 항의하자 압둘 하미드는 그와 아운에게 압둘 무탈립이 죽으면 아운이 후임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던 1882년 9월 총독 오스만 누리 파샤는 그를 폐위하고 압달일라 이븐 무함마드를 샤리프로 옹립하였다. 술탄 압둘 하미드는 총독의 일방적인 결정을 거부하고 아운 알 라피크를 샤리프로 봉하였고, 그는 이듬달 메카에 당도하였다. 여담으로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메카 아미르의 임명이 전보를 통해 공표된 경우였다. 23년의 집권 후 아운 알 라피크는 1905년 7월에 사망하였고, 형 압둘라의 돔형 영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아운 알 라피크의 사후 히자즈 총독 아흐메드 라팁 파샤는 알리 이븐 압둘라를 샤리프로 우선 추대하고 이스탄불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 외에 1877년부터 이스탄불에서 후계자 단계를 밟던 샤리프 후세인과 1883년에 합류한 숙부 압달일라, 그리고 자이드 가문의 알리 하이다르 등 3명의 후보가 더 있었다. 3달 후 압둘 하미드는 총독의 결정을 승인하였다. 그러던 1908년 7월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 시에 샤리프 알리와 아흐메드 라팁 파샤는 그들의 개혁에 반대하였다. 이듬달 파샤는 체포되었고, 샤리프 알리는 9월 말엽 새 총독 카짐 파샤가 당도할 때까지 임시 총독을 맡았다. 그동안 그는 장교들에 의해 타이프 병영으로 끌려가 신헌법 지지 선언을 하였다. 장교들은 샤리프가 법적으로 노예, 군인, 베두인과 같다며 공식적으로 선포하며 망신을 주었다. 그후 샤리프 알리는 총독의 메카 귀환 요청을 거부하고 타이프에 머물렀다. 샤리프의 완고함에 지친 카짐 파샤는 1908년 10월 그를 해임하였다. 그 후 이스탄불에 머물머 임명을 고대하던 압달일라가 후임으로 선포되었으나 4일도 안 되어 출발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한편 고집스럽게 히자즈에 남아있던 전 샤리프 알리는 1909년 4월에야 샤리프 후세인의 압력으로 [[카이로]]로 향하여 1941년 사망 시까지 그곳에 머물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