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카 (문단 편집) ==== [[헤자즈 왕국]] ==== 이스탄불에 있던 후세인과 알리 하이다르 중 후자가 청년 튀르크당과 친분이 있었음에도 명망이 높던 후세인이 아미르로 임명되었다(1908년 11월). 같은 해 오스만 제국은 [[다마스쿠스]]와 [[메디나]] 간의 헤자즈 철도를 완공하여 순례의 편의성 및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다만 철도를 메카까지 연장하려는 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연기되었다. 중앙 정부의 방침대로 사우디 세력을 견제하는 등 그에 협조하던 [[샤리프 후세인]]은 점차 그들의 [[튀르크]] [[민족주의]] 열풍에 경계심을 느꼈다. 오스만 의회의 일원이던 아들 압둘라의 조언대로 후세인은 튀르크 국가가 되어가는 오스만 조에서 탈피해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고, 제국의 관심이 [[유럽]] 전선에 쏠린 틈에 [[영국]]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다. [[이집트]]와 [[이란]] 사이에 아랍인 국가 설립을 약속 받은 샤리프 후세인은 스스로 히자즈의 왕이자 말리크 빌라드 알 아랍(아랍 지역의 왕)임을 선포하며 공식적으로 오스만 조에 반기를 들었다. 1916년 당시 대부분의 [[튀르키예군|터키군]]은 히자즈 총독 갈립의 지휘 하에 고지대의 타이프에 있었고, 메카에는 오직 1천여 병력만이 남아있었다. 그마저도 6월 10일 봉기가 개시될 당시 대부분 수면 중이었다. 샤리프 후세인이 하심 궁전 창문에서 공중으로 총을 발사하는 것을 신호로 5천여 하심 당원들은 메카를 굽어보는 3개의 요새들과 제다 방면 교통로에 위치한 지르왈 병영의 터키군을 공격하였다. 오스만 측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봉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몰랐던 그 지휘관은 샤리프 후세인에게 전화하여 상황을 물어보기도 하였다.[* 심지어 오스만 깃발과 하심 깃발은 같은 색깔이었다.] 후세인은 그에게 이유를 말해주고 항복을 종용했으나 거절 당하였다. 6월 11일 하심 군대는 하람 사원 부근 사파 구역의 바쉬-카라콜을 장악하였다. 12일에는 총독 관저인 하미디아가 점령되었다. 사로잡힌 총독 대리는 잔여 [[튀르키예|터키]] 병력에게 항복을 지시했으나 거부되었고, 그 후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봉기가 시작된지 며칠 후 오스만 조정은 후세인의 경쟁자 알리 하이다르를 메카의 아미르로 선포하였다. 이에 후세인은 제다에 있는 알리 하이다르의 심복 아흐메드 엘 헤자지를 체포, 그의 집을 약탈하게 하였다. 알리 하이다르는 3백여 병력과 함께 다마스쿠스를 거쳐 히자즈 철도를 따라 파크리 파샤가 지키던 메디나에 당도하였지만 1917년 봄 조정의 명으로 철수하였다.[* 그 후 알리 하이다르는 1919년 공식적으로 직위가 폐지될 때까지 메카의 아미르 칭호를 유지하였다.] 한편 메카의 교착 상태는 수단의 영국 장군 레지날드 윈게이트 경이 제다를 통해 두 문의 대포를 이집트인 포병들과 함께 보내주며 전환점을 맞았다. 포격에 힘입어 요새의 성벽이 뚫렸고, 하심 군대가 총공격에 나섰다. 결국 7월 4일, 마지막 터키군 점유지인 지르왈 병영이 3주간의 강한 저항 끝에 항복함으로써 5세기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메카 지배는 종식되었다. 이로써 메카를 수도로 하는 헤자즈 왕국이 공식 수립되었고, 8월에는 타이프가 점령되었다. 1916년의 핫즈는 기존 터키인들의 수탈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1917년 아카바, 1918년 시리아, 마지막으로 강력히 저항하던 메디나가 종전 후인 1919년 1월 항복하며 국왕 후세인은 [[알레포]]에서 메카에 이르는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국가 문제를 놓고 후세인은 동맹 영국과 충돌하였고, '아랍 지역의 왕' 칭호를 두고도 네지드 토후국의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와 대립하고 있었다. 1918-19년 히자즈와 네지드 사이의 알 쿠르마 [[오아시스]]를 두고 벌어진 전쟁에서 하심 군대는 대패하였고, 와하비 군대의 히자즈 진격은 영국의 엄포로 겨우 중단되었다. 그 후 1920-21년 하일의 자발 샴마르를 정복하고 1922년 메카 남쪽 아시르 지방을 정복한 압둘 아지즈는 1923년 초엽 히지즈 정복을 결심하였다. 그러던 1924년 3월 3일, [[튀르키예|터키]]에서 칼리파제가 폐지되자 이틀 후 후세인은 [[요르단]]에서 칼리파를 칭하였다. 후세인과 대립하던 영국의 불간섭을 확인한 압둘 아지즈는 그 해 9월 타이프 점령을 시작으로 히자즈 정복에 나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