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나라 (문단 편집) == 역사 == [[원나라]] 말기에 [[홍건적의 난]]과 군벌들의 봉기와 수많은 한족 [[백련교]]도들의 중심 반란으로 전국이 어지러워지자 일어난 [[홍무제|주원장]]은 처음엔 [[백련교]]-[[홍건적]]에 몸담았다가 두각을 나타내 지도자가 되어 오왕을 자칭하였다. 그 후 각지에서 한족 군벌들과 원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가 되어 명나라를 세운 뒤 [[베이징시#s-5|대도]]를 함락시켰다. 황제 [[혜종(원)|혜종]]은 베이징을 버리고 [[몽골 고원]]으로 도망쳤고 [[만리장성]] 이남은 명나라의 깃발 아래 통일 되었다. 홍무제(주원장)는 [[난징시|난징]]을 수도로 하고 대규모 숙청을 일으켜 공신들을 제거하면서[* 개국 공신 및 그들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수만 명을 죽였다.] 명나라의 기초를 닦았다. 홍무제 재위시절 황태자인 [[주표]]가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손자인 [[건문제|주윤문]]이 황태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는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표]]외에 다른 아들들은 [[번(제후국)|번왕]]으로 임명하여 약간의 병사를 주고 마치 지방 제후처럼 역할을 주고 있었다.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에 오른 손자 건문제(주윤문)는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삼촌인 번왕들을 숙청하려다 오히려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자 가장 강력한 군사를 가지고 있던 연왕 [[영락제|주체]]가 일으킨 [[정난의 변]]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연왕은 스스로 3대 황제에 올라 영락제로 즉위하였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명나라)|정화]]를 시켜 남해안을 탐사하게 하고 [[몽골]]([[타타르]]), [[오이라트]]와 계속 전쟁을 벌여 북방을 억제하였으며 [[교지(명)|베트남을 점령하여 중국의 영토로 만든다.]] 영락제의 손자인 [[선덕제]] 시기에는 비록 베트남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선덕제의 현명한 통치로 번영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정통제]]가 즉위하자 환관 [[왕진(명나라)|왕진]]의 국정농단으로 국정이 혼란스러워진다. 또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기가 찾아와 북쪽에선 [[오이라트]]의 [[에센 칸]]이 침공해오며 남쪽에선 왜구가 해안가를 약탈한다. 명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오히려 에센에게 대패하여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토목의 변]]이 일어났다. 그래도 에센 칸이 내분으로 살해되고 명나라 군대가 몽골족을 격파하여 위기는 벗어났으며 천순제(정통제)가 돌아와서 수습하게 된다. 이후 [[성화제]]와 [[홍치제]]가 선정을 펼치면서 평화와 안정을 찾아 번영한다. 다만 이 시기부터는 더이상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명은 영락제 이후 식민지인 베트남에서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하여 베트남이 독립하고 토목의 변에서도 몽골에게 패하여 수도가 외적의 침공을 받는것에서부터 군사력이 약해졌음이 제대로 드러났다. 그러다보니 명은 영락제 이후로는 더는 주변국에 대한 패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국토를 방어하는 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명 4대 암군|무능한 황제들]]이 즉위하면서 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특히 북로남왜의 위기가 다시 찾아왔는데 계속된 [[다얀 칸]]과 [[알탄 칸]]을 비롯한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수도까지 위협받는 사태가 벌어진다. 남쪽에선 [[왜구]]가 해안가를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하고 지방을 초토화하는 위기가 찾아왔다.([[북로남왜]]) 게다가 명나라 황제들의 무능과 누적된 정치-경제 위기는 사회적 불안을 가져왔다. 1572년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황제 [[만력제]]가 즉위하였는데 초창기 신하 [[장거정]]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장거정이 비전있는 정책으로 국가를 안정시켰으나, 장거정이 죽고난 후부터는 만력제가 정치에 흥미를 잃었고 국정을 내팽개치면서 무능한 정책을 남발하였다. 거기다 [[만력 3대정]]으로 재정은 파탄나고 무거운 세금에 시달린 농민들의 불만은 커졌고 농민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동림당]]과 반 동림당과의 갈등과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 세력의 정치 농단으로 명나라의 정치 혼란은 심해졌다. 한마디로 [[명 4대 암군]] 시기부터 명나라의 국운은 결정적으로 기울어진것을 넘어서 멸망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숭정제]]가 즉위하여 [[위충현]]을 제거하였지만 명은 이미 누적된 정치 혼란과 경제 혼란으로 막장이 된 터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변방의 [[만주]]에서 [[여진족]]이 [[만주족]]을 자칭하여 [[청나라|후금]]을 세우고 굴기하여 명을 위협하게 된다. 명은 이를 [[조선]]과 연합해 제압하려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요동]]과 여진족에 대한 패권을 최종적으로 상실하였다. 후금은 이후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과 국교를 수립하고 몽골 부족들을 점진적으로 복속하였다. 이후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에 즉위하여 명나라와의 대결 노선을 확실히 했다.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완전히 복속시킨 청나라가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에 대승을 거두자 명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이 위태로워졌다. 이때 [[이자성]], [[장헌충]] 등이 일으킨 [[이자성의 난]]과 같은 농민 반란이 전국을 휩쓸고 농민군이 수도 베이징으로 몰려오는 사태가 발생한다. 정예군이 청나라(후금)와의 결전에서 전멸한 상태에서 변경 수비대만으로 북방을 막고 있던 명나라는 농민의 대병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지방군마저 모두 반란군에게 패배하면서 더는 반란군을 막을수 없었다. 결국 베이징이 이자성군에 함락되자, 숭정제는 자결하면서 명나라는 사실상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를 막기 위해 [[오삼계]] 등이 지휘하던 명나라 군대가 적이었던 [[청나라]]에 투항하자 [[산해관]]에 [[입관]]한 청나라 군대는 이자성군을 순식간에 격파하고 베이징을 점거한다. 입관 이후 [[명청교체기]] 동안 이어진 [[중국 대륙]] 정복 전쟁에서 이자성-장헌충 반란 세력과 [[남명]] 정권은 연달아 패배하고 청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였다. 남명의 [[영력제]]가 살해당하면서 주씨의 후손은 끊겼고,[* 나중에 대왕 주계의 12대 손인 주지련이 옹정제 시기에 벼슬을 받고 명나라 제사를 잇게 되었다.] 청나라에 투항했던 옛 명나라 장군 출신 번왕이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삼번의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마지막으로 [[타이완 섬]]의 [[동녕 왕국]]([[명정(동녕 왕국)|명정]]시기)도 [[펑후해전]](澎湖海戰)에서 청나라한테 대패하여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은 그렇게 청에게 굴복해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나 남아있던 명나라 [[유민]] 가운데 일부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 아래 청나라 시대 내내 [[비밀결사]]의 형태로 남기도 했다.[* 많은 명 유민들이 전쟁을 피해 외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이민 가기도 했다. 이들은 현지와 많이 동화됐지만, 초창기 동남아 [[화교]]의 기원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