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수도 (문단 편집) == 기타 == 잘 알려졌다시피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모함으로 인한 파직과 고문, [[백의종군]][* 게다가 그 와중에 모친의 사망에도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칠천량 해전]]으로 그 동안 육성한 수군의 참패와 손실. [[삼도수군통제사]]로의 재임명과 고난 등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이 곳 명량수도에서 [[명량대첩|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둔 대표적인 [[임진왜란]] 승전지 중의 하나로 명량수도가 시작되는 진도군 벽파진과 건너편 해남 문내면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56년 11월 29일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李忠武公碧波津戰捷碑)가 세워졌다. 비문은 노산 [[이은상(시인)|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썼다. 근처에 1688년 세워진 보물 503호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도 있다.[* 일제강점기때 경복궁에 옮겨졌던 것을 1947년에 해남의 해안지역(문내면 학동리 1186-7번지)으로 옮겨 세웠다가 2011년 3월 원 설립지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이순신|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새우신 곳이 여기 더니라. > >옥에서 풀려나와 삼도수군통제사의 무거운 짐을 다시 지고서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땅 벽파진에 이르니 > >때는 공(公)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삽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를 지키셨나니 예서 머무신 16일 동안 사흘은 비 내리고 나흘은 바람 불고 맏아들 회(薈)와 함께 배 위에 앉아 눈물도 지으셨고 9월 초 7일 적선 18척이 들어옴을 물리쳤으며 초 9일에도 적선 2척이 감포도(甘浦島)까지 들어와 우리를 엿살피다 쫓겨갔는데 공이 다시 생각한 바 있어 15일에 진(津)을 옮기자 바로 그 다음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사 만고에 깊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 >이충무공벽파진전첩비(李忠武公碧波津戰捷碑) [[진도대교]] 옆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도 세워져 있으며, 근처에는 진도타워라는 전망대도 있는데 역시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 역할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