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의왕후 (문단 편집) == 영광의 태후 == 명의왕후가 궁주였을 때 유명하고 오래된 궁궐을 하사받았는데 [[명복궁]]은 고려 초부터 존재해온 유서 깊은 궁전이고 연덕궁은 [[남궁]]이라고도 불린 유명한 별궁이었다. 이후 숙종 4년인 1099년 3월 2일 왕비(王妃)로 책봉되어 숙종의 왕후로 인정된다. 이후 숙종이 붕어하고 맏아들인 예종이 등극하자 [[황태후]] 존호를 받고 [[만월대|본궐]] 내에 관저 천화전(天和殿)과 산하기관 숭명부(崇明府), [[절일]][* 생일]을 지원절(至元節)로 정하게 된다.[* 동시에 명의왕후의 출신지인 개경 개성부 정주는 개경 승천부(承天府, 昇天府)로 행정단위가 수직 상승한다. 개성부에 예속된 경기 상태에서 부(府)로 따로 분리 된 것이다.] 이후 예종 재위 6년에 사망한다. 시호는 명의왕태후(明懿王太后)이며 손자 [[인종(고려)|인종]]이 유가(柔嘉), 4대손 [[고종(고려)|고종]]이 광혜(光惠)의 시호를 추가로 올렸다. 원찰은 [[천수사]]이다. 명의왕후의 장례에 [[요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 애도했다. 그런데 당시 고려 조정의 반응이 "임금님, 이웃나라[* 인국(隣國)]가 태후께서 돌아가셨는데 조문하려 와 제사를 지낸 것이 이번이 처음 아닌가요? ''''인국(隣國)''''[* 《고려사》 후비열전 명의태후 원문 기록]이 이런 예(禮)를 보여줬으니 모든 백료(百僚)[* 모든 벼슬아치]들이 축하해야 마땅합니다."라며 은근슬쩍 요나라를 상국(上國)이 아닌 인국(隣國)으로 낮췄다. 명의왕후에 대한 기록은 '최계방의 묘지명'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에선 명의대후(明懿大后)로 기록되어 있다. 최계방(崔繼芳)은 [[최사위]]의 증손자로 모친인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 김씨와 명의왕후의 어머니인 낙랑국대부인(樂浪國大夫人) 김씨는 자매지간이다. 즉 최계방은 명의왕후와 이종사촌 지간이다. [[분류:고려의 왕비]][[분류:왕대비]][[분류:정주 류씨]][[분류:1112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