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내기 (문단 편집) == 모내기와 한중일 경제사 == 경제사에서 모내기는 한중일의 경제사(史)에 많은 의의를 준다. 모내기는 중국에서 12세기 [[남송]]시절에 보편화 되었고, 일본에서는 14세기 [[무로마치 막부]] 시대부터 일반적으로 보급된다. 그리고 이앙법을 실시한 뒤로 중국과 일본은 생산력 향상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급증하게 된다. 이앙법 실시 후 중국은 인구가 1억을 넘었고, 일본도 17세기가 되자 2천만명을 넘어선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 초기에 농지의 용수 공급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이앙법을 금지했다. 가뭄이 든다거나 해서 모를 옮겨심어야 할 시점에 물을 댈 수 없으면 한 해 농사가 폭삭 망하기 때문.[* 조선 초기에는 후기보다 연 강수량이 부족했다고 한다.] 때문에 조선은 개국 초부터 상류층의 수탈을 막고 안정적으로 민생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16세기경 인구 1천만 명 선에서 인구 증가 정체가 발생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농민들에 비해 조선의 농민들이 지는 부담이 훨씬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체가 발생한 원인의 하나로 조선이 직파법에 의존했기 때문에 농업 생산성이 낮았다는 점을 지목할 수 있다. 전통시대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던 시절이라, 직파법의 낮은 생산력은 국력 약화를 초래했고 이는 [[임진왜란|외세]] [[병자호란|침입]]의 단초가 되었다는 경제사의 시각도 있다. 18세기가 되자 조선 농민은 물을 댈 수 있다면 누구나 이앙법을 하려 했고, 때문에 농촌사회에 점점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넓은 땅을 경작하는 광작과 그에 따른 부농이 출현하게 된다. 그러자 점차 농업은 소비(생존)를 위한 생산이 아닌 이윤추구를 위한 영농의 형태로 진화한다. 이 시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18세기 중반 조선 전체의 인구는 1,800만명으로 세계 7~8위의 인구 대국이 되었으며, 일본 인구의 70%까지 육박했다.[* 1721~50년 일본의 인구는 약 3,100만 명이었단 자료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60% 정도가 된다.] 남북국시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반도 역사상 일본과 인구 격차가 이토록 적게 났던 시기는 18세기 말고는 없었다.[* 다만 이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 성립 이후 [[마비키]]로 인구를 인위적으로 정체시켜서 일정하게 유지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반도의 경지면적은 6.6만km^^2^^, 일본 열도의 경지면적은 6만km^^2^^으로 한반도의 경작면적은 일본 열도보다 적지 않아, 이전에는 고려-조선과 일본의 인구가 비슷하였으나 16~17세기가 넘어가며 일본에서 이앙법이 정착되어 2모작이 가능해진 반면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으로 많은 사망자와 이재민은 물론 많은 농지가 황폐화되어 일본이 조선보다 2배 많은 인구를 가지게 된다. 물론 이때 조선이 모내기를 허용하더라도 조선은 일본보다 위도가 높아 삼남지방에 이앙법이 제한되기 때문에 일본의 인구를 따라잡을 수 없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물론 조선 초기부터 직파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이앙법의 힘을 알기에 대략 10~20%는 모내기 농사를 지었다. 후기로 갈수록 그 수는 늘어가 30% 이상의 성장세를 자랑했지만 지리적 한계로 곡창지대(전라, 충청, 경상)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여전히 국가는 공식적으로 이앙법을 불허하였다.[* 이 이앙법이 고작 10% 늘어난 것만으로도 인구가 천만 가까이 늘었음을 보았을 때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다.] 농민들도 이앙법의 단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서, 스스로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노력을 보였고, 결국 국가에서도 농업용수에 필요한 보를 만들고 관리하는 방법을 설명한 책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1모작에서 2모작으로의 변경은 실제 경작 영토가 늘어나는 개념과 비슷하다. 생산량이 늘어나기 때문에(빠르게), 인구가 증가한다(천천히). 인구는 생산량에 비해 늘어나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생산량 증가와 인구 증가의 갭에서 잉여생산물이 존재하게 되며, 잉여생산물의 존재는 상업 발달의 필수 조건이다. 한일 양국 모두 이앙법을 받아들인 뒤에야 상업이 진흥하게 된다. 일반적인 한국사회에서, 사농공상을 일컬으며 조선은 상업을 천시했고, 일본은 상업을 중시하여 양국의 국력이 역전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사상 만능주의로 결과만을 본 것이다. 인류사의 전통 중세-봉건사회에서 '중상주의'로서 상업을 발달시켰던 국가나 민족은 드물다. 상업은 중상주의 같은 사상이 아니라 잉여생산(식량)이 필수 조건이며 식량 문제가 해결될 때 생존(식량확보) 이외의 산업이 성장해 상업 세력이 등장한다. 기존의 중세-봉건 정치 권력이 상업 세력의 권력에 뒤처질 때 '중상주의' 사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일본의 이러한 상업의 발달은 이앙법 등 일본의 기후와 경작법을 원인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18세기 후반에 이앙법이 널리 퍼진 조선 사회에서도 상업의 발달이 검증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