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문룡 (문단 편집) === 부정적 평가 === 모문룡의 군공이 어느정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상당히 뻥튀기 하거나 다른 사람의 공을 자기 것처럼 가로채는데 능했음은 여러모로 확인이 된다. 그를 출세가도로 이끈 진강대첩부터 과연 모문룡의 공인지 아니면 그의 상관이었던 왕화정의 공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으며, 이후에도 그가 활약했던 여러 전장에서 비슷한 논란이 계속 있었다. 또한 조선 백성을 학살하고 그 수급을 마치 전장터에서 적을 죽인 공처럼 꾸미기도 했다. 그의 상관이었던 병부상서 왕가립과 원숭환 모두 모문룡을 "실제 군공은 별거 없다"고 평가절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청나라 건륭제나 강희제 시절 자신들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명나라의 충신들에게는 시호를 내리거나 벼슬을 추증했지만[* 그리하여 [[원숭환]] 뿐만 아니라 청군이나 이자성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손전정]], 노상승도 모두 청나라에서 시호를 받았다.], 모문룡에게는 그 어떤 시호도 내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대부터 모문룡의 평판이 매우 안좋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명사(역사책)]]에서도 모문룡의 행적은 원숭환전에 딸려서 알 수 있고, 독립된 열전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였다. 위에도 있지만 [[원숭환]]은 모문룡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밖에 안 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 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난민(亂民)을 살육한 것으로 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스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설사 위의 긍정적인 면을 모두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모문룡이 조선에 부린 행패는 그야말로 극악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정묘호란]] 내내 가도에 처박혀 있다가 다 끝나고나서 부하들을 보내 청군은 건드리지 않고 청군에 의해 머리를 깎은 애먼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목을 베어다가 명나라 조정에 청군의 목이랍시고 바쳤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1만에 달했다고 한다. 더구나 조선 서해안가를 중심으로 무역하다가 기분 내키면 약탈을 저지르고 조운선이나 지방 관아를 공격하여 관곡도 털었던지라 [[평안도]] 사람들은 모문룡을 모강도라 부르며 [[청나라]] 군대보다도 더 무서워할 지경이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도 모문룡은 계륵과 같은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제거하자니 그가 운영하는 가도의 전략적 가치가 너무 높고 가만 두자니 그의 비행이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자국을 약탈하는 모문룡을 좋게 보았을리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모문룡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