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문룡 (문단 편집) ==== 동강진([[가도]]) 주둔 ==== 이렇게 빈집털이를 당한 것을 알게 된 후금의 누르하치는 11월 [[아이신기오로 아민|아민]]을 보내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모문룡이 수복했던 랴오닝의 여러 도시들을 다시 공격해왔다. 100여명의 병력만을 보유했던 모문룡은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에 상륙하였다. 당연히 100여명의 빈약한 수군을 거느린 모문룡이 후금의 철기병을 상대할 수는 없었고, 결국 요동을 탈출해 조선땅으로 월경해 도망쳐왔다. 후금군은 조선을 자극할까봐 일단 압록강에서 멈추고 조선의 의주부윤 정준에게 서한을 보내 월경해 명군을 추격할 하는 것을 허가해달라고 요구했고 [[광해군]]은 이를 허가하였다.[* 이것은 청나라측 설명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무단으로 넘어왔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조선군에 후금군에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고 지시한 듯 하며,후금군도 조선군과 교전하지 않고 명나라인 500여명을 죽이고 압록강을 건너 귀환했다.] 모문룡은 조선땅에서 후금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평안도 일대를 패주하여 철산의 가도로 도피했다. 모문룡은 가도를 중심으로 명나라 피난민을 대상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둔전을 재배했다. 그리고 철산 가도를 동강진이라고 칭하고 병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명나라는 20만냥을 댔다고는 하지만, 당시 각지의 농민반란으로 재정이 어려웠을 것이고, 육지로 이어져 있지 않은 모문룡군까지 계속 군자금을 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당시 경제가 그다지 발달되지 안하서 물물교환 경제였고, 임진왜란 때만 하더라도 은자는 그다지 소용도 없었으니 당시도 거의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문룡은 대부분 평안도 지방을 수탈하는 것으로 군수물자를 마련했을 것이다. 모문룡군은 가도를 중심으로 요동반도의 여러 섬들을 지배하였으며, [[수군]]이 없이 해상 전투에 익숙하지 못한 후금군은 이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1622년 6월 명나라 조정은 공식적으로 모문룡을 평요장군에 봉하고 계급을 총병으로 승진시켰다. 1624년 누르하치는 화평을 위해 동강진에 사신을 보냈고, 모문룡은 사신을 배로 북경까지 보냈다. 이때 모문룡을 좌도독으로 승진시켰다. 모문룡은 동강진을 거점으로 요동지역을 계속 공격하여, 후금의 후방을 교란했다. 이런 모문룡의 활약으로 당시 명나라 조정 [[동림당]]에 속했던 명신 진량훈은 철산 가도의 동강진을 "바다밖의 장성이다"라고 일컬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