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용초 (문단 편집) === 남연의 황제 === 동년 10월 11일, 모용덕이 붕어하자 모용초가 황제에 올라 사면령을 시행하고 연호를 태상(太上)으로 고쳤다. 모용덕의 처 단황후를 황태후로 높이고, 여러 군신들에게 관직을 봉서했다. 모용초는 모용덕의 옛 대신들인 북지왕 모용종(慕容鍾)과 단굉(段宏)이 편치 않아 외지로 보내 멀리하고,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인 공손오루(公孫五樓)를 측근으로 삼아 무위장군, 둔기교위를 더해 내정에 참가하도록 했다. 태위 봉부(封孚)가 공손오루를 비판하며 옛 대신들을 가까이 하라고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남연의 개국공신인 모용종과 단굉은 불평하는 기색이 역력하여 말했다. >'''"황구(黃狗)의 가죽이 결국 호구(狐裘)[* 여우 겨드랑이 털로 만든 옷]를 덧대는 데 쓰일 것이다."''' 공손오루는 이 말을 전해듣고 저 둘을 원망하게 되었다. 황제가 된 이후, 모용초가 정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과도하게 측근을 챙기며 사냥만 즐겨해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봉부와 상서 한작(韓𧨳)이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숙부 모용덕의 제사를 지낼 때 모용법이 나타나지 않자 모용초가 그를 규탄한 적이 있어, 모용법은 늘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모용종 및 단굉과 뜻이 맞아 셋은 반란을 모의했다. 황제 모용초가 이를 알고 모용종을 조정으로 부르자, 모용종은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이에 모용초는 모용종과 친하던 시중 모용통(慕容統), 우위 모용근(慕容根), 산기상시 단봉(段封)을 붙잡아 주살했다. 그리고 좌복야 봉숭(封嵩)이 모용법과 왕래했다는 정남사마 복진(卜珍)의 말을 믿고 봉숭을 거열형에 처했다. 이를 본 서중랑장 봉융(封融)은 [[북위]]로 망명했다. 도성 내의 반란 세력을 제거했다고 여긴 모용초는 계림왕 모용진(慕容鎭)을 보내 청주의 모용종을 공격하고, 모용욱(慕容昱) 등을 보내 서주의 단굉을 치고, 제양왕 모용응(慕容凝)과 중서시랑 한범(韓範)을 보내 연주의 모용법을 공격했다. 먼저, 모용욱이 거성(莒城)을 함락하자, 단굉은 서주를 버리고 북위로 도망갔다. 연주를 공격하러 가던 모용응은 한범을 죽이고 군을 독점해 도성을 습격하는 계획을 세우다가 들키는 바람에 한범에게 역으로 습격당해 모용법에게 도망갔다. 한범은 모용응의 군대까지 흡수하여 모용법과 모용응을 격파했고, 모용법은 북위로, 모용응은 후진으로 각각 달아났다. 모용종도 모용진에게 패배해 청주가 함락되자, 처자식을 죽이고 고도공 모용시(慕容始)와 함께 땅굴을 파 후진으로 도망쳤다. 이렇듯 반란 세력을 성공적으로 궤멸시켰으나, 도망쳤던 봉융이 청주의 도적들을 규합해 석새성(石塞城)을 기습하여 진서대장군 여울(餘鬱)을 죽이니, 남연의 민심은 진정되지 않았다. 406년, 모용초는 과거의 육형과 9관등제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군신들이 모두 반대하여 실패했다. 407년, 말도 없이 장안에 두고 온 어머니 단씨와 아내 호연씨가 생각난 모용초는 어사중승 봉개(封愷)를 후진에 보내 그들을 모셔오도록 했다. 하지만 모용초가 즉위했을 때 이미 요흥이 어머니 단씨와 처 호연씨를 구금해둔 상태였다. 요흥은 그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모용초의 칭번과 태악의 악기 및 무녀(舞女)들의 양도를 원했고, 그게 힘들다면 동진에서 잡아온 1,000여 호를 후진에 보낼 것을 요구했다. 모용초는 군신들을 불러 의논한 끝에 한범을 사자로 보내 요흥이 선호하는 것에 따르기로 했다. 후진으로 간 한범은 남연이 칭번함을 알리고 요흥에게 유세하여 단씨와 호연씨를 돌려받기로 약속받았다. 요흥이 원외산기상시 위종(韋宗)을 보내 모용초에게 조서를 내리니, 모용초는 신하의 예로 조서를 받았다. 이후 모용초가 좌복야 장화(張華), 급사중 종정원을 보내 태악의 악기와 무녀 120여 명을 바치자, 요흥은 매우 기뻐하며 연회를 열어 장화와 종정원을 초대했다. 술이 무르익고 가무가 시작되자 황문시랑 윤아(尹雅)가 장화를 향해 >"은나라([[상나라]])가 망할 때 그 악사들이 주나라로 갔는데, 지금 악사들이 연나라에서 진나라로 왔으니 이것만 봐도 흥망성쇠가 예측된다" 며 웃었다. 이에 장화가 답했다. >"예로부터 제왕들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고, 그 오묘한 도리는 모두 뛰어난 공업(功業)을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노자]]께서 이르시길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포기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악사들이 서쪽으로 가면 반드시 마치 메뚜기떼처럼 다시 동쪽으로 향하게 될 겁니다. 이는 화복(禍福)이 번갈아온다는 것을 암시하는 징조입니다!" 요흥이 이를 듣고 소국이 감히 맞먹으려 하느냐며 분노하자 장화가 다시 겸손히 아뢰었다. >"당초 신이 명을 받고 출사할 때 진실로 상국(上國)과 서로 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상국이 소국(小國)의 신하를 괄시하고, 그 국군(國君)과 국가를 모욕했는데, 신하된 자로서 어찌 그 말에 대한 몇 마디의 대답도 못하겠습니까!" 요흥은 그를 매우 칭찬하고, 다음날 귀국하는 장화 일행에게 모용초의 어머니와 처를 돌려주는 동시에 예물을 두텁게 하여 남연에 보냈다. 모용초는 친히 청주 대현(臺縣) 마이관(馬耳關)까지 나가서 그들을 영접했다. 408년 정월, 어머니 단씨를 황태후, 처 호연씨를 황후로 삼았다.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내던 중, 크기가 말만한 붉은 쥐 같은 짐승이 나타나 제단 옆까지 왔다가 사라졌다. 이때 낮이었는데도 짐승이 나타나자 큰 바람이 불면서 주위가 어두워지고 의장과 장막이 모두 찢겨졌다. 모용초는 매우 두려워 태사령 성공서(成公緖)에게 물으니, 성공서는 폐하께서 어진 이들을 죽이고 아첨하는 간신들을 신용해 나라가 어지러워 그런 것이라고 답했다. 이를 들은 모용초는 측근인 공손오루와 복진 등을 내쳤지만 얼마 안가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