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용초 (문단 편집) === 남연 멸망 === 409년 6월, 유유의 동진군이 모용초가 매복 중이던 대현산을 그냥 지나쳐 어떠한 공격도 받지 않은 채 대현산 동쪽에 있는 동완(東莞)에 도착했다. 공손오루는 유유를 막기 위해 서둘러 임구의 거멸수(巨蔑水)를 향해 나아갔다. 진격하던 공손오루의 남연군은 유유의 선봉인 [[맹용부]]와 싸워 패배하고 공손오루는 도주했다. 유유는 전차 4,000승을 좌•우익에 두고 천천히 진격해 임구성 남쪽에서 다시 단휘의 군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해가 지는데도 승패가 갈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유유는 참군 호번(胡藩)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번, 자의참군 [[단소(유송)|단소]], 건위장군 상미(向彌)에게 별동대를 이끌고 임구성을 몰래 기습하도록 했다. 별동대는 빠르게 임구성을 향해 돌진했고, 상미가 먼저 성벽을 올라 성문을 열면서 임구성이 함락되었다. 임구성이 떨어졌단 소식에 놀란 모용초는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대현산에서 나와 임구 남쪽에서 유유의 동진군을 막고 있는 단휘와 합류했다. 유유가 임구성을 함락시켰다고 외치며 병사들을 풀어 남연의 군사를 공격하자, 황제 모용초가 합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연군의 사기는 바닥을 쳐 이내 격파당했다. 모용초는 대패했고 단휘를 비롯한 남연군의 대장 10여 명이 유유에게 참살당했다. 모용초는 수도 광고로 도망쳤지만 오래지 않아, 유유의 군대가 승세를 타고 광고성까지 진격해 외성을 쳐부수고 내성을 포위했다. 유유는 참호를 3중으로 파 내성의 포위를 굳건히 하는 동시에 남연의 인사들을 회유했다. 모용초는 자신의 무리를 모두 내성으로 거두어 농성을 하고, 상서랑 장강(張綱)을 후진의 요흥에게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했다. 그리고 옥에 갇힌 모용진을 석방해 상서사, 도독중외제군사로 승진시키고 대장으로 삼았다. 모용초는 여러 신하들과 모용진에게 그동안의 일을 사죄하고는 말했다. >"짐은 숙부께서 창건한 대업을 계승했으면서 어질고 선량한 인재를 등용하지 않고, 고집불통처럼 행동했다. 쏟은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으니 후회막급이로다! 일이 위급할 때 지혜로운 사람이 모략을 쓰고, 재난이 닥쳤을 때 충신들은 절개를 세운다고 했다. 그러니 제군은 기발한 계책을 세워 이 고난과 위기를 함께 넘기도록 하자!" 이에 모용진이 답했다. >"백성들의 마음은 오로지 폐하 한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친히 군대를 이끌었다가 패전하여 도망가셨으니, 신하들은 자신이 없고, 선비와 백성들은 모두 의기소침하여 안팎의 형세는 더이상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만약 후진이 내환을 앓고 있다면 그들 또한 병력을 나누어 우리를 구할 겨를이 없을 것이니, 저희들은 천명에만 의지해 다시 한 번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돌아온 패잔병 수만 명이 아직 있으니, 금과 비단, 궁녀들을 모두 꺼내어 장병들을 위로함으로써 그들이 온 마음을 바쳐 명을 받들게 만든 뒤 성에서 나와 동진군을 기습하십시오. 하늘이 우릴 도와주신다면 능히 저 도적을 요격할 수 있을 겁니다.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 죽음 또한 가치 있을 것이니, 문을 닫고 앉아서 적을 기다리는 것보단 낫습니다." 하지만 사도 낙랑왕 모용혜(慕容惠)가 패잔병으론 계란으로 바위치기니 차라리 후진에 사신을 더 보내자며 반대를 외쳤고, 모용초 또한 모용혜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한범과 왕포(王蒲)를 후진의 사신으로 보내 다시 한번 구원병을 요청했다. 모용초의 측근이었던 상서 원존(垣尊), 경조태수 원묘(垣苗) 형제가 내성을 빠져나와 동진군에 항복해 행참군에 임명되었다. 후진에 구원군을 요청하러 갔던 장강이 허탕을 치고 돌아오던 중 동진의 태산태수 신정(辛靜)에게 붙잡혀 유유 앞에 끌려왔다. 유유는 장강을 누거에 태워 내성 밖을 돌면서 >"[[혁련발발]]이 후진군을 격파해 구원해줄 병사가 없다." 를 외치게 하니, 광고성 안의 사람들은 더욱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심지어 동진군은 매일 증원병이 와 그 수가 계속 불어만 갔고 내성의 포위는 점점 조여왔다. 모용초가 사신을 보내 대현 남쪽을 떼어주고 칭번할 것을 청했으나 유유가 거절했다. 요흥도 유유에게 사자를 보내 남연에서 물러가지 않으면 대기중인 철기병 100,000명을 즉시 진격시킬 것이라고 협박했지만, 유유 또한 지지않고 남연 정벌 이후 3년 뒤에 너네 치러 갈테니 기다리라 말하면서 맞받아쳤다. 북위에 항복해 청주에서 도적질을 하던 봉융도 이때 유유에게 귀순했다. 한편, 장안에 도착한 한범과 왕포는 구원병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여 후진의 위장군 요강(姚强)이 이끄는 10,000명의 기병과 함께 광고로 향했으나, 후진이 이성 전투에서 혁련발발에게 대패하면서 요강은 장안으로 돌아갔다. 이에 한범은 >"하늘이 남연을 멸하려는구나" 라며 탄식했다. 한범과 왕포는 모용초에게 돌아가지 않고 유유에게로 가 항복했다. 유유가 한범을 누거에 태워 내성을 돌게 하자, 광고성을 지키던 사람들의 사기는 급격히 제작되었다. 어떤 이가 모용초에게 한범의 가문을 주살할 것을 청했으나 모용초는 한범의 동생 한작이 충성을 다한다며 거절했다. 409년 12월, 유유에게 항복한 장강이 동진군을 위해 충차 등 기묘한 공성 무기들을 만든 것을 본 황제 모용초는 대노하여 장강의 어머니를 잡아다가 찢어죽이고 광고성에 매달았다. 영대령 장광(張光)이 천문이 좋지 않다며 항복할 것을 권했다가 그 자리에서 모용초에게 손수 죽임을 당했다. 410년 정월, 모용초가 총애하는 비첩인 위부인과 함께 성벽에 올라 동진군의 강성함을 보고 손을 마주잡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작이 이를 보고 >"어찌 아녀자처럼 우십니까!" 라고 호통치자 사과하면서 눈물을 닦았다. 상서령 동선(董詵)이 항복을 권했다가 분노한 모용초에 의해 옥에 갇혔다. 410년 2월, 모용하뢰노와 공손오루가 땅굴을 이용해 동진군을 공격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포위가 너무 길어져 내성을 지키던 이들이 줄줄이 도망쳐 이탈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용초가 가마를 타고 성벽에 오르자, 상서 열수가 나서서 항복을 권했다. 모용초가 한숨 쉬며 외쳤다. >'''"흥쇠(興衰)는 모두 천명이다. 나는 보검을 휘두르며 죽을지언정, 항복해서 살 수는 없다!"''' 유유가 마침내 사방에서 공격을 가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항복했고, 열수는 광고의 성문을 열어 동진군을 맞이했다. 모용초는 좌우 수십 기병을 데리고 광고성을 나와 도망치다가 동진군에게 붙잡혔다. 유유는 모용초를 앞에 무릎 꿇게 하고는 항복하지 않은 죄 등 여러 죄상을 나열했다. 그러나 모용초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어머니 단씨를 [[유경선]][* 유경선이 환현을 피해 남연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당시 북해왕이었던 모용초와 친분을 쌓은 적이 있었다.]에게 맡깁니다." 라는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유유는 광고성이 오래도록 버틴 것에 분노해 성 안의 사람들을 생매장하고, 그 처와 딸들을 동진군의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려 했는데, 한범이 말려서 그만 두었다. 대신 남연의 왕•공 이하 3,000여 명을 참하고 내성 거주자 10,000여 호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유유가 마지막으로 남연의 종묘를 파괴한 뒤, 모용초를 동진의 수도 건강으로 압송해 그곳에서 참수하면서 남연은 건국 13년만에 멸망했다. 모용초는 5호 16국시대에서 같은 모용부 계열인 [[토욕혼]] 쪽을 제외하면 마지막 선비 [[모용부]] 출신 황제였다.[* 당시 [[북연]]도 아직 멸망하진 않았으나 모용씨는 축출되고, 한족인 풍씨에게 먹힌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