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상고등학교 (문단 편집) === 성장기와 혼란기 === [include(틀:목포학생만세운동 참여 학교)] 1922년 목포공립상업학교(목포상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성장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학제는 총 5년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목포에는 여러 금융기관들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조선식산은행 목포지점[* 이 지점이 목포부금고를 맡을 정도로 위세가 강력했다. 현재 행복동1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구.제일은행 목포지점으로 제일은행이 인수한 지점이다. 역사순으로는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지점으로 이 지점의 후신인 [[SC제일은행]] 목포지점은 아직도 하당에서 열렬히 영업중이시다.], 18은행 목포지점,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 있었으며 후에 창립하게 되는 호남은행[* 후에 동일은행에 강제 합병되어 [[조흥은행]]으로 출범한다. 이 은행의 목포지점은 최근까지도 신한은행으로 영업하다가 이전하였다. 상락동1가에 건물이 남아있어 등록문화재 지정 후 [[신한은행]]과 목포시에서 관리중이다.] [* 작곡가 손석우가 호남은행에 입행한 케이스이다.] 또한 목포상업학교 출신들이 많이 채용되었다. 그러다가 평시와 관계없는 학교 상황이 계속 되다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 2천만 생명을 사랑하고 우리 조국을 사랑하는 광주남녀학생 수십 명은 빈사의 중상을 입고 200여 명은 불법검거로 철창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들은 정의를 위해 시위했던 것이다……” > 광주학생만세! (光州學生萬世)! > - 생도들이 뿌린 격문 - (출처: 1929년 12월 6일 자 동아일보) >싸워라, 싸우자. >전 피압박 민족 제군! 우리들은 사회적 민족적 착취와 압박을 받았다. >보라, 압제자의 비인간적 만행과 폭압 전제 정치를! 광주학생항쟁에서 경찰 당국이 취한 처치를! 흉기를 가지고 도전해 온 자들은 중학생(일본인)이 아니었던가. 빈사의 중상을 입고 철창에서 신음하는 고보생! 그들은 정의를 위하여 가두에서 시위하였다. >우리들은 광주형제의 석방을 요구하며, 참고 참아 오던 피와 눈물로써 시위를 전개하자. > - 생도들이 뿌린 격문 (2) (출처: 1929년 12월 6일 자 동아일보) >하나! 악법 폐지 >하나! 피압박 민족은 가두에서 시위하라. >하나! [[국민혁명|중국혁명]] 지지 >하나! [[제국주의]] 반대 >하나! [[대한독립만세|식민지 해방 만세]] (기외, 2항 있음) >2천만 전 피압박 민중 제군. >2천만의 생존을 사랑하고, 우리들의 [[광주학생항일운동|조국을 사랑하는 광주 청년 남녀 학생은 독인 같은 일제의 탄압에 부딪쳤다.]] 그들은 옥내에서,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런 슬픔은 >>영원히 피압박자의 흉중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보라, 정의를 위하여 가두에서 시위한 [[광주제일고|광주 고보생]]들은 자유를 불법으로 약탈당한 한 개의 동물이 되고 말았다. >기억하자, 우리들은 광주형제들을 그들의 손으로부터 탈취하자. 동시에 피와 눈물의 시위를 하는 것만이 우리들의 역사적 임무이다. >하나! [[치안유지법]] 즉시 철폐 >하나!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전취하라. >하나! 피압박 민중해방만세(기외, 7항 있음). > - 생도들이 뿌린 격문 (3) (출처: 1929년 12월 6일 자 동아일보) 당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하게 된 계기가 목포와 전혀 상관 없던 것이 아니였다. 발생지였던 광주와 나주는 당시 목포의 영향력 하에 있던 도시로, 당시 목포의 한인 학생이 있었던 교육기관인 목포공립상업학교도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목포시내에서의 시위로 발생하였다. 학생 시위대는 학교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내의 전화선과 전신을 모두 절단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전부 차단한다. 이에 11월 19일 오후 1시경에 시위대를 구성하여, 양동(현재의 대성동 일부)과 무안통(무안동)을 걸쳐서 목포역전까지 진출하였고 이 중간에 목포정명여학교(현. 목포정명여자중학교)와 목포공립실과고등여학교(현.목포여자중학교)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대규모로 변하였다. 이를 두고 보고만 있지 않던 목포경찰서는 100명의 경찰을 투입, 70명의 학생을 구속시켰다. 주도자로 이광우와 [[박종식]][*국회의원 [[박지원]]의 아버지이며, 후에 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의 등이 경찰에 의해 지목되어, 광주지원에서 징역을 선고받았다. 물론, 그 전에도 독립을 향한 염원을 비추인 사건은 있었다. 1926년에 목포제유노동자들이 총파업하면서 몇몇 학생들이 파업시위에 동참한 것을 시작으로 1922년에 학생들이 휘문학교와 연계하여 결성했던 학생조직을 재건했던 것이다. 이 학생조직은 꽤나 탄탄해서, 1930년대 후반에 목포상업학교독서회(木浦商業學校讀書會)가 결성되어 기존의 선인(鮮人)학생회의 계보를 이었으며, 이에 목포부와 조선총독부에서 강제 해산을 하기 위해 강구하기 시작했고, 당시에 목포에서 발생했던 비밀결사 전위동맹사건으로 교장이었던 오카타 요시타카는 무력으로 해체를 감행하였다. 그리고 이 해산 사건은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켜서, 그 다음해에 목포상업학교에서 치러진 [[시험]]에서 조선인 학생들은 모두 백지를 내자는 행동을 하기로 결심하였고, 이 행동은 며칠이 지나고 [[휘문고보]]에서 발생한 백지시위의 동기가 된다. >韓典勳 신문조서(제二회) > > 피의자 韓 典 勳 > 위 사람에 대한 보안법 위반사건에 대하여 소화 五년 二월 二一일 京城지방법원 검사국에서 > > 신문자 조선총독부 검사 森浦藤郞 > >서기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鈴木直夫 >열석하여 검사는 전회에 이어서 피의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문하다. > > >문 韓典勳인가. > >답 그렇다. > > ...(중략) > 문 교육의 정도는 어떤가. > > 답 휘문고등보통학교 五학년인데, 금년 一월 一二일 퇴학했다. > > 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기타의 단체에 가입해 있었는가. > > 답 관계가 없다. > > 문 금년 一월 一二일 밤에 張洪琰과 백지동맹의 상의를 했다는데 그런가. > > 답 그 날 밤에 勸農洞의 徽文학교 四학년생의 집에서 [[장홍염|張洪琰]], 李錫天, 金炳欽, 柳文熙 등 一〇명쯤이 모여서 張洪琰은 一二일에 시험이 시작되는데 三학년과 四학년은 백지동맹을 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백지동맹을 하자고 하니 그것에 찬성하고 一三일부터 백지의 답안을 내기로 정했다. > > 문 [[장홍염|張洪琰]]은 왜 백지동맹을 계획했는가. > > 답 시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 문 기타 목포에서도 백지동맹을 하고 있으니 학교에 반항하기 위하여 백지동맹을 하자고 한 것이 아닌가. > > 답 光州의 학생 및 '''[[목상고등학교|木浦상업학교]]'''에서도 백지동맹을 했으니 京城에서도 하자고 했었다. > > ... (후략) ... > 진술자 韓 典 勳 > 위 조서를 진술자에게 읽어 주게 하였더니 틀림없다고 진술하고 자서 무인하다. > > 작성일 [[소화]] 五년 二월 二一일 > > 신문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 [[조선총독부]] 검사 森浦藤郞 > > 서기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鈴木直夫 또한, 이 시기인 [[1939년]]에는 현재 부지인 [[용당동(목포)|용당동]] 교사로 이전했는데, 이때 부터 지금까지 용당동에 자리잡고 있다. 이때 건설 비용은 총 18,000여원이었다. >목포상교공사착수(木浦商校工事着手) >【목포(木浦)】목포상업학교의 이전신축문제는 기지매수수속급 설게등으로 인하야 아직까지 밀려나오든바 이지음 모든준비가완성되엿슴으로 지난칠일 도청에서 공사입할(입찰(入札))을 식켯스나예정가격에 달하지못하얏슴으로목포부에서수의로 청부를 시켯다는데 완성기는 한사개월후이라고하며공사비는 일만팔천여원이라한다 > 조선일보, 1937년 5월 15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