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요상 (문단 편집) == 생애 == 1935년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이담면(현 동두천시)에서 태어났다. 목장흠의 후손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대로 양주군 이담면에서 살아온 양주(동두천) 토박이이다. 동두천초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사법시험|고등고시 사법과]] 13회에 합격하여 판사로 근무하였다. 1971년 '다리'지 필화 사건에서 무죄를 판결하였다. 이것이 [[박정희]] 정권의 눈 밖에 나서 [[10월 유신]] 선포 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하였다. 이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그러나 정작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에 경상북도 대구시 동구-[[남구(대구)|남구]] 선거구[* 처가가 대구에 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3515138#home|##]]]로 [[공천]]을 신청하였다가 [[이효상]]에 밀려 탈락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 [[북구(대구)|북구]]-[[동구(대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김용태(1936)|김용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3년 민주한국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직할시 북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박준규(1925)|박준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이에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1990년)|꼬마민주당]]에 잔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91년)|민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통일국민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문희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동두천시]]-양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 [[정성호(정치인)|정성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훈훈하게도 낙선하고 나서 정성호 당선인을 찾아가 축하해주며, 양주 지역민들을 위해 힘써달라고 격려해줬다고 한다. 이후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정계 은퇴 이후에 의정부에서 변호사로 재개업했으나, 현재는 휴업한 상태. ‘자유연대’라는 보수단체의 원로위원회에는 목요상 국민의힘 상임고문 등이 이름을 올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