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몰리에르 (문단 편집) === 죽음과 사후 === 몰리에르는 1665년 즈음부터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았고, 결국 [[결핵|폐결핵]]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속적으로 작품을 써 내려갔고 공연을 했다. 그는 생제르맹앙레 성에서의 축제를 위해 <시칠리아 사람{{{-2 ''(Le Sicilien)''}}}>을 썼고, 1668년 1월 13일에는 <암피트리온{{{-2 ''(Amphitryon)''}}}>을 발표했다. 같은 해에는 <조르주 당댕 혹은 어리둥절한 남편{{{-2 ''(George Dandin ou le mari confondu)''}}}>와 <수전노{{{-2 ''(L'Avare)''}}}>를 발표했다. 1670년 10월 14일에는 다시 한 번 더 [[장바티스트 륄리]]와 협업을 해 <서민귀족{{{-2 ''(Le Bourgeois gentilhomme)''}}}>을 발표했다. 귀족의 삶을 따라하려는 부르주아를 풍자하는 내용이 담긴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672년 몰리에르의 연극 인생의 대부분을 동반한 마들렌 베자르가 세상을 떠났다. 마들렌의 사망으로 큰 상실감을 느낀 몰리에르의 건강은 악화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펭의 간계{{{-2 ''(Les Fourberies de Scapin)''}}}>를 발표해 또 다시 큰 성공을 얻었다. 1673년 2월 10일, 몰리에르는 궁정 음악가인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와 협업해서 제작한 <상상병 환자{{{-2 ''(Le Malade imaginaire)''}}}>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몰리에르는 <상상병 환자>의 네 번째 공연을 하던 도중 기침과 각혈을 한 후 쓰러졌지만, 이내 다시 일어나 공연을 마저 이어 나갔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그는 또 다시 쓰러져 집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아내 이름을 부르면서 남긴 유언은 >"아르망드를 불러와....난 이렇게 간다고...말해줘." 당시 배우는 천대받는 직업이었기에 프랑스 왕국의 법률상으로 배우가 죽으면 제대로된 장례식을 할 수도 없었고 묘지에 묻힐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몰리에르의 아내 아르망드 베자르는 [[루이 14세]]에게 장례식을 요청했고, 왕이 이를 허가하자 몰리에르의 시신은 장례식을 거친 후 세례받지 못한 영유아들이 묻힌 묘지에 매장되었다. 아르망드는 1677년에 외스타슈 프랑수아 게랭(Eustache François Guérin, 1636~1728)과 재혼했다. 1년뒤에 아들을 얻었지만 이 아들은 30살로 요절했다. 1700년 10월 30일에 아르망드는 55살로 세상을 떠났다. 1817년, 몰리에르의 시신은 [[파리(프랑스)|파리]]에서 가장 넓은 공동묘지인 페르 라셰즈 묘지로 이장되었다. 그가 이장된 자리는 프랑스의 유명 시인이자 동화 작가인 [[장 드 라 퐁텐]]의 묘지 근처다. 몰리에르의 극단은 그의 사후 현재 프랑스의 국립극단인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