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진 (문단 편집) == 동양사 == 동양은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전근대적 총력전이 시작되었고, 군주와 정부의 역할이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했다. 게다가 한나라 이래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일반적이었던 [[징병제]]는 효율적인 정부의 지방행정력과 중앙정부의 병력 집결 역량, 그리고 중앙정부에서 내려보내는 무장의 총괄지휘 없이는 작동이 불가능한 체제였으므로, 중앙정부의 생환에 곧 전쟁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게다가 [[유교]]의 영향으로 지방 호족들이나 군벌들 역시 형식적으로나마 자신들의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미덕이었고, 따라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군주가 자신의 영향권 그 자체인 도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특히 동아시아 농경 문명국들에게 사실상 공공의 적이었던 북방 유목민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동력을 가지고 있어, 선방어를 기도하다가는 국가가 하루아침에 결딴날 가능성이 높아 종심방어를 위해 군주와 정부가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것이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었다. 다만 동아시아에서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이것이 통용되지 않은 곳이 전국시대의 일본으로, 군웅할거의 시대가 된 일본에서 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달아남은 곧 자살을 의미했다.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나가는 순간, 그 어디에도 자신의 편이 없었고 자신을 죽이고 자기 땅을 꿀꺽하려는 경쟁자들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할복]]하거나 끝까지 싸우다 죽는 문화가 생긴 것은 그들이 단지 싸움에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이유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중앙집권이 잘 되지 않아 몽진하다가 생고생을 한 경우가 고려의 현종이다.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고려는 수도가 불바다가 되었고, 현종은 정부 부처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소수의 경호원과 원정왕후 및 소수의 재상, 노자가 될 재산만 거느리고 그야말로 걸음아 날 살려라 몽진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충청도 쪽에서는 거란군이 현종을 바짝 추격해 '''10리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2개의 고을을 거쳐갔는데 그 중 중간 기착지였던 [[공주]]와 도착지였던 [[나주]]를 제외한 '''모든 고을에서 왕을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친 현종은 이후 개경으로 돌아와 군주의 권위와 집권 체제의 불안함을 몸소 느낀 경험을 살려, 고려의 중앙집권체제를 세우고 법과 제도를 개혁하며 다수의 대도시에는 관리를 파견하는 등 고려를 중앙집권 국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군이 되었다. 어쨌던 전술한 이유로 인해 동아시아에서는 전문적인 무장에게 군사를 맡기고 행정부는 다른 도시로 달아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행정부가 무책임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정치적, 지정학적 특성에 의한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