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묘호 (문단 편집) === [[조선]] ~ [[대한제국]] === [[조선]]은 제후국 예법을 가장 철저하게 따랐으나 사망한 임금에게 묘호를 올렸다. 심지어 [[고려]]가 천자국 용어를 사용한 것을 참람하다고 여겼지만 묘호만큼은 고려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원래 건국 직후에는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처럼 창업군주 4대조에게 [[이안사|목왕]], [[이행리|익왕]], [[이춘|도왕]], [[이자춘|환왕]]으로 시호를 올렸으며, 1408년에 승하한 [[태조(조선)|이성계]]에게도 묘호 없이 '''강헌왕'''이라는 시호만 붙을 예정이었으나 [[태종(조선)|태종]]이 '''태조'''라는 묘호를 올리고, "모(某)왕"으로 추존되었던 태조의 조상들에게도 각각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묘호를 올리면서 묘호제가 정착되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청나라]]와 교류할 때는 [[태조]]니 [[성종]]이니 하는 묘호 대신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시호로만 사용했다. 왜냐하면 원래 묘호란 황제국에서만 사용하는 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성종(조선)|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802010_004|우리는 제후국인데 묘호 쓰는 것을 중국에 걸릴 것을 걱정하여 묘호를 삭제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 지시는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되었다. 묘비나 편장 등에서 묘호의 조, 종을 운자로 쓴 것이 많아 시호로 무조건 바꾸기 어렵고 다른 수많은 서책들을 모두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서책이 중국으로 들어가 알려질 수도 있으니 서책에서는 쓰지 말자는 주장이었고, 자기 묘호를 쓰지 말라는 지시도 공식 전교가 아니라 대비가 전한 것으로 '내가 공이 없는데 어찌 묘호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정도의 겸양의 의미였다. >엎드려 듣자오니, 지금 묘호를 의논하면서 혹은 '인(仁)'으로 하자 하고, 혹은 성(成)으로 하자고 하다가 마침내 성(成)으로 칭하여 올리기로 하였다 합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시법(諡法)에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정사를 세운 것을 성(成)이라 한다.[安民立政曰成]’ 하셨으니, 이것으로는 대행왕의 거룩한 덕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전(傳)에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친다.[爲人君止於仁]’ 하였으므로 자고로 제왕의 아름다운 칭호로 인(仁) 자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 등이 비록 시호를 의논하는 반열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거듭 깊이 생각건대, 인(仁)으로 칭하여 올리자는 것이 의논하지 않고도 생각이 같으니, 이것이 실로 공론이며 여러 사람의 마음에 아주 맞는 것입니다. 지금 중조의 묘호(廟號)를 피하여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지 않으니, 신자(臣子)의 마음에 심히 미안합니다. 묘호를 한 번 정하면 백세에 고치지 못하는 것이니 위에서 재량하소서. >---- >《[[연산군일기]]》, 연산군 1년 1월 14일 1번째 기사 이후 [[성종(조선)|성종]]의 묘호와 관련된 논쟁에서 '인(仁)' 을 지지하는 파에서는 "시법에 '[[백성]]을 편하게 하고 정사를 바로 세운 것'을 成이라 하는데 이걸론 대행왕의 성덕을 다 표현 못합니다"라든지, "成은 仁에 미치지 못하옵니다" 라는 발언이 속출하였다. '인(仁)'은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서 굉장히 고평가받는 묘호였으나 정작 이 묘호를 받아간 임금은 즉위 기간이 1년밖에 안 된 [[인종(조선)|인종]]과 후대의 평가가 많이 박한 임금인 [[인조]]였으니 아이러니. 그래도 인종은 묘호 그대로 인자하기는 했다. 또 仁이 명나라 홍희제의 묘호를 범한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仁 한 글자가 참람해서 피할 거면 애초에 묘호도 안 올리는 게 맞는 거 아니냐'며 재반박하기도 하였다. '성(成)'을 지지하는 세력도 이에 맞서 판서급 대신들이 "성종(成宗)으로 하되 혹 대성(大成)으로 하는거면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반박하였지만 신하들은 전반적으로 인종으로 하자는 [[여론]]이 매우 우세했다. 하지만 정승들이 "[[중국]]의 묘호를 범(犯)하는 것([[명나라]] 4대 황제 [[홍희제]]의 묘호가 인종) 은 옳지 않으며 성종도 뜻 자체로는 훌륭한 이름입니다"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건 대간들이 [[태조(조선)|태조]]도 [[홍무제|태조]]를 섬겼고 [[태종(조선)|태종]]도 [[영락제|태종]]을 섬겼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원로대신들이 태조는 [[건국]]한 임금, 태종은 계승한 [[임금]]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사로운 칭호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대다수 [[국가]]에서 태종이라는 묘호가 두 번째 임금에게, 국조에게는 태조라는 묘호가 올라갔다. 태조와 태종이 단순 묘호를 넘어 일종의 보통명사로 굳어진 셈이다. 고려 2대 왕인 혜종도 2대 국왕이라는 의미에서 태종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조선 태종도 그 당시에는 2대 정종이 '권서국사'라는 명목으로 공정왕 시호만 받고 묘호를 못 받아 실질적으로는 태종이 2대 왕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나라도 '원나라'라는 나라를 처음 세운 황제는 쿠빌라이 칸이지만 몽골 제국의 초대 칸인 칭기스 칸과 2대 칸인 오고타이 칸을 넓은 의미에서 원나라의 국조와 2대 황제로 간주하여 각각 원 태조, 원 태종으로 추존하고 자신은 세조의 묘호를 받았다.] 게다가 "내가 통감을 보니 인종이라는 묘호가 처음 쓰였던건 [[송나라]]이던데 [[인종(송)|송나라 인종]]은 물러터져서 [[서하|오랑캐의 화]]를 겪었다더라. 그게 울 아빠의 성덕에 견준다고 생각해?"라는 [[연산군]]의 의견이 맞아떨어져 결국 성종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홍희제|명나라 인종]]의 묘호를 범할 수 없다는 정승들의 논리는 이후 끝까지 지켜지지는 못했는데 나중에 이러한 원칙을 다 무시하고 결국 [[인종(묘호)|인종]]이란 묘호를 올린 사례([[인종(조선)|조선 인종]])가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무고죄|무고]]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증거로 든 것 중 하나가 묘호의 사용이었다. '''바로 몇 년 전에 [[임진왜란|일본과 피터지게 싸운]]''' 조선이 일본과 손잡았다는 말 자체가 허무맹랑한 것이었기에 정응태가 사형당하는 것으로 끝났으나, 다른 건 다 모함이었다고 해도 묘호 사용은 사실이었기에 조선 측에서도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고 고려 때부터 관습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어차피 조선에서 내부적으로 묘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중국도 모른체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에서 그 문제를 굳이 들추려는 사람은 정응태 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조선에서도 솔직담백하게 해명할 수 있었다. 이 사건 때문에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소동이 있긴 했지만, 결국 앞으로 묘호 문제가 화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다소 싱거운 결말로 끝났다. 청나라도 마찬가지라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후에도 조선에서는 묘호를 계속 사용했다. 어찌 됐든 시간이 지나면서 느슨해지긴 했어도 당대에 묘호를 사용하는지 아닌지를 상당히 신경썼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의 경우는 다른 왕조에 비해 조(祖)를 붙인 왕이 지나치게 많다. 일단 기본 용법 중 하나인 개국 시조 앞 몇 대를 추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조선에서 실제로 재위한 왕들 가운데 조의 시호를 받은 왕은 창업군주인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세조(조선)|세조]], [[선조(조선)|선조]], [[인조]], [[영조]], [[순조]]로 무려 6명이나 되며 추존 왕인 태조 이성계의 4대조(고조부 목조 이안사, 증조부 익조 이행리, 조부 도조 이춘, 부친 환조 이자춘), [[대한제국]] 시기에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 역시 대한제국 시기에 정조로 추존된 [[정조(조선)|정종]], 문조로 추존된 [[효명세자]]까지.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공식적으로 문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므로 고종부터 4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장조-정조-순조-문조-고종으로 가계가 이어졌다. 이 때문에 헌종과 철종은 '조'로 추숭되지 못한 것. 다른 왕조의 사례를 보면 바로 전 왕조인 고려도 추존된 태조 왕건의 3대조인 국조, 의조, 세조를 제외하면 500년 동안 조를 받은 왕은 태조 한 사람뿐이다. 이는 고려조에는 법도가 달랐던 것이 아니라, 왕건의 가계가 4대조를 상고할 수 있을 정도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조는 왕씨 직계 조상이 아니라 외가 쪽 조상으로 추정된다. 이런 조종 묘호 시스템의 원조인 [[중국]]에서 찾아보면 [[한나라]], [[명나라]], [[원나라]]([[몽골 제국]])는 두 명[*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다른 한 사람은 각각 [[광무제]], [[영락제]], [[쿠빌라이 칸]]인데, 이쪽 역사를 안다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세 사람은 사실상 나라를 새로 세운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 심지어 [[당나라]]나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등은 중국 왕조치고 오래 지속된 나라들인데도 창업군주 딱 한 사람만 '~조' 자 묘호를 받았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이들 '조'들에게도 일관된 법칙이 있는데, 바로 형제승계 혹은 방계승계로 사실상의 새 왕통을 연 임금들이다. 정조는 대한제국의 4대추숭으로 올라간 사례라 제외. 태조 이후 최초로 '조'가 붙은 [[세조(조선)|세조]]의 경우 [[예종(조선)|예종]]이 대놓고 '''"재조(再朝, 나라를 다시 일으킴)하신 분이니 그냥 세조로 하지?"'''라고 갈궈서 성사시킨 것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ha_10009024_002|#]] 이후 명종의 조카로 조선 최초의 방계왕통을 연 [[선조(조선)|선조]], 광해군을 들어엎고 다시 한 번 방계왕통을 연 [[인조]], 후궁의 아들로 경종으로부터 사상 초유의 왕세제 책봉을 받아 형제승계를 이룬 [[영조]], 역시 후궁의 아들인 [[순조]] 등. 사실 세조 이후 네 군주의 경우 '공이 있어서' 조(祖)를 붙인다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긴 한데, 공으로 따지자면 양차 왕자의 난을 승리하고 조사의의 난을 평정한 태종,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에 나선 세종 등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위의 선조와 영조, 순조는 원래 선종, 영종, 순종이었으나 후에 다시 추숭하여 조로 올린 것이기 때문에 태종과 세종도 마찬가지로 사후 추숭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태종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일단 태 자가 붙은 상태에서는 확실히 불가능한데 이미 [[태조 이성계|태조]]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하려면 [[명성조]]처럼 아예 글자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태종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어지간한 ~조 씹어먹는 수준의 위력을 지녔다는 게 또 문제다. 결국 공 운운은 갖다 붙인 구실이고 실제 정치적인 목적은 따로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위에 나왔듯이 [[시호]]를 짓는데 [[시법]]이 있듯이 당연히 묘호를 짓는데 그 방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유난히도 조선에서는 세조부터 지켜진 적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종'으로 묘호를 올렸으나 이후에 추숭한 경우가 너무 많다. 조선에서 '조(祖)'를 받은 임금들의 각각 받은 사유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 개국 시조 앞의 4대조에 해당. 이는 한자 문화권의 모든 왕조들이 기본적으로 해온 것으로서 정상적인 묘호 추존이다. * [[태조(조선)|태조]]: 개국 시조들이 거의 기본적으로 받던 묘호로서 정상적인 묘호 추존이다. * [[세조(조선)|세조]]: 아들인 [[예종(조선)|예종]]이 강력히 밀어붙여서 채택되었다. 원래는 [[신숙주]] 등이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으로 정해 올렸다. 전통적으로 묘호를 정할 때 하나만 올리면 신하가 왕에게 통보하는 모양새가 되어 좋지 못하므로 보통 신하들이 묘호나 시호 후보 세 가지를 올리면, 대개는 첫 번째 후보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상 신하들이 첫 번째로 내놓은 안건으로 하자는 뜻으로 올린 걸 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말 없이 첫 번째를 택하곤 했다. 그런데 예종은 이를 정면으로 뒤집어 버린 것. 참고로 예종이라는 묘호는 세조의 아들인 본인이 다음대에 가져갔다. 세조의 묘호 후보로 나온 성종과 세조의 손자 성종은 한자가 다르다. 결국 예종은 신숙주가 올린 안건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반드시 세조로 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여 결국 관철시켰다.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009024_002|실록 기사]] 그리고 예종이 이렇게 선례를 만들어버린 탓에 이후 조선에서 '조' 남발이 시작된다. * [[선조(조선)|선조]]: 세조와는 달리 원래 묘호가 '선종'이었다. [[광해군]] 시기에 정통성을 강화하는 목적에서 추숭되었다. 추숭할 때의 명분은 [[종계변무|종계(宗系)를 올바르게 밝히고]], [[임진왜란|왕업을 중흥]]한 공로.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808004_008|실록 기사]] * [[인조]]: 1차로 정해진 것은 '열조'였으나, [[남당]]의 [[이변(남당)|열조]]가 하필 찬탈한 황제라 --찔렸는지-- 논란이 되었고,~~[[소열제|한소'''열'''제]]도 있는데 왜?~~ 일주일 뒤에 다시 의논을 하여 '인조'로 정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005023_001|실록 기사]] 이에 '조(祖)'가 너무 남발된다며 반발하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효종(조선)|효종]]은 [[세조(조선)|전]][[선조(조선)|례]]들이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가볍게 일축해버렸다. [[http://sillok.history.go.kr/id/kqa_10005023_002|상소문]] * [[순조]]: 원래 묘호는 '순종'이었으나, 철종 시기에 정통성을 강화하는 목적에서 추숭되었다. 추숭할 때의 명분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사학([[천주교]])을 처단했다는 근거였다. * [[영조]]: 원래 묘호는 '영종'이었다. 1890년 고종 시기에 정통성을 강화하는 목적에서 추숭되었다. 추숭할 때의 명분은 나라를 오래 안정시키고 백성을 잘 다스렸다는 것. 선조와 마찬가지로, 실록에는 '영종'으로 표기되어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701005_001|추숭 당시 실록내용]] * [[사도세자|장조]], [[정조(조선)|정조]], [[효명세자|문조]]: 엄밀히 말하면 조선의 추숭으로 조로 올라간 것이 아니고 [[대한제국]]의 4대조 추존으로 인해 올라간 사례. 셋 모두, 처음에 받은 묘호는 '조(祖)'가 아니었다. 각각의 원래 묘호는 장종, 정종, 익종.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아버지는 알다시피 [[흥선대원군]]이지만, 왕위에 오른 후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저 셋은 고종의 양고조할아버지, 양증조할아버지, 양아버지에 해당한다. 순조도 양할아버지에 해당하지만, 이미 철종 때 '조(祖)'로 추숭되었기 때문에 묘호가 바뀌지는 않았다. 즉, 조선의 '조(祖)' 묘호 남발과는 좀 다른 경우에 해당한다. 대한제국이 워낙 짧게 끝났기 때문에 조선의 연장선처럼 취급되고, 하필 고종이 대한제국의 개국 시조보다는 망국의 군주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이들의 묘호를 '조(祖)'로 하는 것은 동아시아 왕조 국가의 전통상 합당하다. 이 외에도 [[중종(조선)|중종]]의 묘호와 관련해 아들 [[인종(조선)|인종]]이 '중조'로 고치는 것이 어떠하냐며 의견을 피력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사례를 잘 보면, 4대조 추존 등 합당하게 '조'로 올린 것과 왕위 계승이 워낙 개판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정통성 강화 목적으로 올린 영조와 순조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왕이 된 아들들이 '조'로 하자고 홀로 주장해서 '조'가 된 케이스'''들이다. 세조로 해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 붙인 예종이나, 선조로 추숭한 광해군, 인조로 올린 효종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인조'로 묘호를 정하고 나서 들어온 상소문을 보면 "예종과 광해군이 부왕의 묘호를 세조와 선조로 정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당대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 이를 부정하는 이들의 언행들은 그저 뇌피셜 뿐인 잘못된 주장과 행동일 뿐이다. 애초에 세조도 아들인 예종이 밀어붙인 것과 상관없이 후계자도 아닌 사람이 왕위를 찬탈하고 오른 것이기 때문에 묘호에 종이 붙을 수 없었다. 예종은 조선왕조 임금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기가 원하던 묘호가 붙은 임금이다. 살아생전에 자기가 죽으면 묘호를 예종으로 하고 싶다고 직접 밝혔다고 한다.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은 [[한일합방]] 이후 그들이 죽자 [[조선총독부]]의 [[이왕직]]에서 올린 묘호이다. [[일본 제국|일본]]에서 올린 묘호인 셈인데, [[한일합방]] 이후에는 더 이상 [[대한제국 황제]]가 아닌 각각 "덕수궁 이태왕",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되었으니 묘호를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왕직에서는 의외로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설왕설래 끝에 고종이 생전에 황제위에 있었다는 점을 존중하기로 하고 황제의 예법에 따라 고종에게 묘호(고종)와 시호(태황제)를 올렸다. 이후 [[1926년]] 순종 승하시에도 고종의 예에 따라 묘호(순종)와 시호(효황제)를 올렸고, 실록도 각각 "[[고종실록]]", "[[순종실록]]"으로 발간되었다. ‘사이버조선왕조’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광해군]]에게 재평가의 의미로 혜종(惠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사례가 있고, 심지어 [[의친왕]]이나 [[영친왕]]에게 묘호를 붙여 부르는 이도 있다고 하나, 이런 사례들은 개인이나 사적 단체에서 사사로이 행한 이벤트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하고, 공식적으로 광해군이나 영친왕에게 묘호는 없다. 광해군은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고, [[의친왕]]과 [[영친왕]]은 [[대한제국 황제]]로 재위한 적이 없으므로 현대의 한국에서 그들에게 묘호를 올린 사실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영친왕과 황사손 [[이구]]에게 사시(사적으로 올린 시호)를 올린 바는 있으나,[* 영친왕에게 의민, 이구에게 회은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때도 시호를 올리는 선에서 그쳤고 묘호를 올리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