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기음 (문단 편집) ==== 역사 ==== * 고대 한국어 참고로 고대 한국어 시기에 이미 [[거센소리]]는 [[예사소리]]와 구별되었지만[* 처음 한자가 도입될 시기에는 거센소리마저 아직 한국어에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인명이나 지명에 사용된 한자 중 예사소리(전청全淸)와 거센소리(차청次淸)가 혼용된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마치 ㅐ와 ㅔ를 구별하지 못하는 요즘 사람들이 ㅐ와 ㅔ를 혼용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하겠다.] 된소리는 아직 구별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국어학계의 정설이다. 한반도에서 한자를 받아들이던 당시에 된소리가 있었다면 [[청탁|전탁음]](全濁)이 된소리로 정착되었겠지만 [* 我國語音, 其淸濁之辨, 與中國無異, 而於字音獨無濁聲(한국 말소리에서 [[청탁]]의 구별은 중국과 다름이 없으나 유독 한자음에서만 탁성이 없다). 즉, 유성음을 된소리로 인식했다는 이야기다.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A%B5%AD%EC%A0%95%EC%9A%B4#.EC.84.B1.EB.AA.A8|#]]] 한국 한자음에는 된소리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는 된소리로 발음되는 '씨([[氏]])', '쌍([[雙]])', '끽([[喫]])'은 후기 중세 한국어가 끝날 시기쯤에 된소리화한 것이다. * 중세 한국어 그러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던 당시, 중세 한국어에는 이미 된소리가 구별된다.[* 아예 훈민정음에선 쌍자음이 전탁음과 같다고 설명한다.] 근대를 거쳐 현대에 된소리는 그 세력을 넓히고 있지만 의미 분화에 공헌하는 정도는 거센소리보다 아직도 약하다.[* 예사소리 - 거센소리의 대립으로 이루어진 최소 대립쌍의 수보다 예사소리 - 된소리의 대립으로 이루어진 최소 대립쌍의 수가 더 적다.] 그래도 종래에는 분절 음소의 차이 없이 비분절 운소, 특히 장단으로만 구별되던 단어짝이, 연소한 화자들을 중심으로는 예사소리 - 된소리 차이를 통해 음소적으로 구별되고 있다. e.g. 적다[書] vs. 적ː다[少] > 적다[書] vs. 쩍다[少] * 된소리의 표기법 변천사 한편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당시 거센소리 계열에는 별도의 글자를 만들었으나 된소리 계열에는 별도의 글자를 만들지 않고 이미 만든 글자를 붙여 써서 표기하도록 하였다.[* 동국정운의 경우 유성음을 쌍자음으로 표기했다.] 이 된소리를 표기하는 방식도 한 가지가 아니었다.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 이전에는 현재처럼 같은 계열의 예사소리를 나타내는 글자 두 개를 나란히 쓰는 각자병서보다 ㅺ, ㅼ, ㅽ, ㅾ과 같이 이른바 '된시옷'이라 불리던 ㅅ을 예사소리 글자 앞에 붙여 쓰는 방식인 합용병서가 훨씬 더 오래 사용되었다.(이 방식은 아직도 [[한글 점자]]에 남아 있다. ㅺ, ㅼ, ㅽ은 영어에서의 어두 sk, st, sp연쇄와 유사한데, 이것은 Sonority Sequencing Principle의 영향으로 보인다.) 예시: [[MSG]] 문서에 보면 일제강점기 신문에 실린 아지노모토 광고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맛이 딴판일세'를 '맛이 ᄯᅡᆫ판일세'로 적은 게 있다. * 현대 한국어 [[한국전쟁]] 이후로 한국어에선 [[장단음]]이 소멸되고 유독 된소리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언어를 구별하기 위하여 언중이 무의식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밥]], [[관건]], [[과대]] 같은 단어들이 그 예다. 영어에서 차용한 외래어의 어두유성음을 된소리로 발음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구한말부터 다양한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 현상이다. 영국식 [[용인발음]]에서는 실제로 어두유성음의 기식이 줄어들어 유성무기음화되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대다수 한국인 청자는 이를 된소리로 인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