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당 (문단 편집) === 세습무와 강신무 === 한국의 무당은 주로 세습무와 강신무로 나뉜다. 세습무는 '''사제무'''이라고도 부르며 신내림 없이도 마을의 축제를 대대로 배우고 물려받는 직책이다. '''강신무'''는 신내림이 와서 자신의 몸 안에 신을 모시는 개인적인 형태의 무당을 말한다. 세습무는 특정한 지역의 신체를 모시며 [[대물림]]되는 '''축제의 신관'''에 가까우며, 강신무는 개인적으로 사업을 하거나 세습무를 돕는 '''프리랜서''' 형태의 무당이다. 즉 세습무는 집안-가문(혹은 마을)에 내려진 신을 대를 이어가며 모시는 것이라면, 강신무는 집안-가문이 아니라 개개인의 신체에 내려진 신을 모시는 것이다. ||||||||<#F4AAAA>'''세습무와 강신무의 차이점'''|| ||요소||세습무||강신무|| ||신체 (神體)||마을의 성물, 성소, 신목||자신의 몸|| ||생활||축제가 없을 때는 치성과 수행을 제외하면 일반인처럼 생활함||평소에도 몸속의 신을 위해 무복을 입고 치성하는 비율이 높음|| 본디 이남에서의 굿은 세습무들이 중심이었다. 강신무는 세습무를 도와 굿하는 날을 잡거나 대[* 굿이 시작될 때 신이 왔음을 알려주는 영검한 막대 형상의 상징물. [[삼지창]]에 꿰인 [[돼지]], [[대나무]] 대 등등. 대가 똑바로 서면 신이 온 증거이니 굿이 잘 된다고 믿었다.]를 세우거나 신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하거나, 굿의 부수적인 작업을 전문적으로 단련하여 서로 분업하였다. 기본적으로 굿은 다양한 사설과 [[노래]]와 [[춤]]과 진행과정을 배워야 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이끌어가는 쇼맨십이 필요한데, 이는 어려서부터 혈족들의 굿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배워 익힌 세습무라야 제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 받은 무당들은 대부분 세습무다. 심지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등재]]'''된 경우도 있다. [[강릉시|강릉]]단오제: 빈순애 무당(세습무) -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김윤수 심방(무당의 [[제주어]])(세습무) -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이들은 각각 선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의 며느리, 조카로 전승받은 세습무이다. 당연하지만, 세습무는 수백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전통이라서 매우 어려운 직업이다. 현재 보존회를 만들고 문화재청에서도 관심을 받는 만큼 꼭 혈연관계가 아니라도 본인이 전수받겠다고 나서면 받아준다. 그러나 무형문화재 전수자를 인정받는데 말 그대로 평생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못 버티고 그만두는 경우가 부지기수. 진짜배기 무당이 되려면 수행만으로도 매우 어렵고 괴롭다. 물론, 강신무도 중요한 행사에 초청받는 분들은 인적문화재로서 꽤 중요한 지위를 지닌다. 예를 들면, 작두 계단을 잘 타거나 입담이 좋은 강신무는 다양한 축제마다 서로 모셔가려고 했을 정도로 전문성에서는 세습무보다 더 뛰어난 점이 많은 인력이었다. 세습무는 문화적인 가치가 높은 지역신앙의 중심, 강신무는 전문성과 고급기술로 살아남는 무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세습무들은 마을 축제가 없을 때는 평범한 동네 주민들과 분간하기 어려운 감이 있다. 심지어, 마을의 바깥 일에는 무속적인 간섭을 하지 않는 편이다. 세습무들은 본디 마을 단위의 성소를 모시는 무당이었으므로, 마을 바깥에 대해서는 깊이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애초에 자신의 당골판 바깥은 다른 종교 혹은 무당의 영역이기 때문에 함부로 나서지 않는 문화가 있다. 하지만, 강신무들은 평소에도 [[무복]]을 입고 지내는 경우가 많고, 특유의 비즈니스적인 태도가 자본주의 사회에도 잘 맞는 편이라서 더욱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근대 이후로는 세습무 전통이 파괴되어 버린 마을이 많아서, 강신무들이 지역 축제를 대신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세습무(사제무)들은 마을이나 공동체가 안정되어야 나타날 수 있는 종류의 무당이다. 반대로, 강신무들은 자신의 몸이 신체이기 때문에 몸만 있으면 신령을 모실 수 있으며, 항상 신전을 보살피듯이 수행에 돈이 필요하고, 지속적으로 비즈니스를 벌여야 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 최적화된 무당이 강신무였던 셈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다양한 문화가 파괴되면서 세습무는 남쪽에서만 그 명맥을 간신히 잇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 후 사회의 변천으로 기존의 민간 문화와 성소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강신무들은 지식이 부족해도 신기로 점을 치거나 신통력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지금은 대다수의 무당들이 강신무이며 '만신' 이라는 이북식 표현도 많이 쓰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