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당 (문단 편집) == 유래 == [[한민족]]을 유목민족 전체 역사에 한국 역사를 어떻게 해서든 포함시키려는 [[유사역사학|유사역사학자]]들의 단골 떡밥이 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떡밥으로 [[텡그리 신앙|텡그리]]가 나오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에서 텡그리란 바로 [[환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연히 위에서 나오듯이 [[텡그리 신앙]]은 지역에 따라서 특성들이 상당히 판이했으며, 천신(天神) 신앙 자체가 원래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퍼져있던 신앙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텡그리에 환인의 기원을 귀인하는 해당 주장은 무리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텡그리 신앙|텡그리]]가 [[환인]]과 완전히 같다는 주장이 무리수인 것이지 '''아예 관련이 없는 건 절대 아니고, 오히려 굉장히 관련이 크다.''' [[단군|단군 왕검]] 할 때의 그 '단군'이 '텡그리'와 어원이 같다는 주장과 이에 대한 근거는 상당히 많다. 이건 주류 [[역사학|역사학계]]에서도 제기한 주장이며, [[일제강점기]]에 [[최남선]]이 무당을 지역에 따라 '당골네'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당골네'가 '단군'에서 온 말이라는 주장을 세우면서 같이 제기됐을 만큼, 상당히 오래된 설이다. 참고로 최남선은 독립운동가였다가 변절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사람이다. 최남선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일제강점기 초기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일제가 강요하는 역사관'에 대항하여 독립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한국의 역사를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었고, 특히 일선동조론에 대응하기 위해 [[상고사]] 연구를 통해 한국인의 독자적인 민족적 기원을 규명하려는 시도 역시 중시되었다. 최남선이 변절하기 전까지 가까운 사이였다고 알려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이 분야의 가장 대표적인 산출물이다. 변절하기 전까지는 최남선의 행보 역시 한용운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단지 끝까지 지조를 지킨 신채호에 비해 최남선은 중도에 포기하고 굴복했기에 후세에 전혀 다른 평가를 받게 된 것 뿐이다. 그러므로 최남선의 무당,당골네, 단군 연관설은 일제 식민사관과도 관계가 없다. [[한민족]]의 기원도 [[시베리아]]에서 수렵과 채집으로 먹고 살던 고(古)아시아계 민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시베리아 원주민]], [[퉁구스]]계 제민족, [[아이누|아이누족]], [[한민족]]을 뭉뚱그려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시아]]로 진출 이후 가장 먼저 [[북아시아]]와 [[동북아시아]]에서 정착한 이들로 추정된다. [[언어학]]적으로는 이들의 언어를 [[고시베리아 제어]]라고 하는데 [[비교언어학]]적으로 친연성이 입증된 언어군은 아니다. 아울러 [[고조선]]의 발원지를 [[요서]]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이 2000년대 이후 [[고고학|고고학계]]의 통설이다. 요서지역은 [[몽골]]의 시초로 여겨지는 [[동호]]와 인접해 있으니 자연스레 교류가 잦았을 테고 [[부여]], [[고구려]], [[발해]] 역시 오랜 기간 동안 만주 일대를 통치하며 [[읍루]], [[거란]], [[선비족]], [[말갈]], [[돌궐]] 등 몽골계, 튀르크계, 통구스계 종족들을 포섭하거나 지배하면서 그들의 고유신앙을 융합시키려는 시도를 자연스레 했을 것이다. 그런만큼 '''한국인들의 [[무속|전통 신앙]]이 [[텡그리 신앙]]의 한 분파였거나, 최소한 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고조선이 멸망한 뒤 고조선 영역에서 세워진 나라인 고구려 또한 북방계 몽골, 튀르크 부족들의 [[가한]]신을 섬긴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추정대로라면 고구려는 고조선 계승 의식과는 별개로 고조선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학술적인 논의는 유목민족 문화를 전부 한국사로 분류하려는 [[환빠]]성 주장과는 별개다. 오랜 과거에 A부족이 B부족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A민족의 역사=B민족의 역사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 어느 문화권이든 이와 비슷한 경우가 존재한다. 더 구체적으로 짚어보자면, 북방(시베리아)에서 유입된 수렵·채집·유목민이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탄생에 중요한 기원이 되었다는 것 자체는 정설이다. 기존까지 한반도에서 살던 사람들은 일본열도로 밀려나 [[도래인]]이 되거나 이들 북방민족과 동화되었다. [[반도 일본어설]] 참고. 이 북방계 민족들이 샤머니즘이나 [[텡그리 신앙]]과 같은 시베리아-스텝 문화권 요소를 가지고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하지만 [[환빠]]들의 주장이 빈축을 사는 이유는 여기서 선후관계나 포함관계를 대놓고 뒤집어 버리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조상이 북방계 유목민족의 한 갈래'인 것이지 '유목민족이 한국인의 한 갈래'가 아닌 것이다. 다른 국가 사례로 비유하자면, 영국과 미국은 모두 탄생 과정에서 앵글로색슨족 비중이 큰 국가라는 것은 당연히 사실이다. 하지만 [[환빠]]식 주장을 여기 맞춰 어레인지 하면 '미국의 주요 민족 집단인 앵글로색슨족은 영국인의 주류이기도 하니 영국인은 미국인의 한 갈래'라거나 앵글로색슨족이 게르만족의 한 갈래임을 내세워 '영국 뿐 아니라 독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인들도 미국인의 한 갈래'라고 주장하는 격인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인의 기원이 된 민족이 말타고 활쏘고 다니던 북방계 사람들인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말타고 활쏘던 사람들이 모두 다 한국인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 즉, 오히려 한국인이 동북아의 고대 범(pan) 유목문화에서 독자적으로 갈라져 나왔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아직은 이 마저도 가설일 뿐인지라 일단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당하다. 고대에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처럼 무속 신앙에 관련된 행사가 열렸다. 고려 초기까지만 해도 정식적인 사회 계급으로서 인정받았다. 하지만 [[성리학]]이 국학으로 올라서자 철저한 탄압을 받았고, 근현대 이후로도 비과학적, 비합리적이라 하여 사회적으로 홀대받는 형편이다. [[괴력난신]]을 인정하지 않는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무속|무교]]는 토속 미신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체계적인 종교의 모습을 잃고 사업가 형태로서 살아남았다. [[일본]]의 [[무녀(신토)|미코]]를 포함한 [[동아시아]] 무녀들과 한국의 무당은 유래가 같은 것으로 보이나, 각 나라에서 전통 신앙을 대하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크다. 한국은 세습무의 전통이 많이 사라지고 민중들에게 친화적인 분위기로 [[광대]]적 문화가 발달하여 [[굿]]에서 등장하는 여러 사설들이 상당히 해학적인 면들이 지역 굿에서 목격된다. 반면 일본은 천 년 가까이 세습무들이 보존되고 체계적인 무교 문화가 정착되어 '무녀'라는 한자 표현을 널리 쓰고 전국적으로 정해진 복장을 입는다. 한국에서는 무당이 사회 제도에서 배척받고, 민중의 호감을 사기 위한 광대이자 주술사로서 살아남았다. 덕분에 박사, [[무녀]]라는 '한자어'보다는 토속적인 표현인 '박수'와 '무당'으로 널리 부른다. 또한, 지방이나 개인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다른 옷을 입는데, [[무복]]이나 화려한 굿의 의복들을 참고하자. 단, 한국에서도 세습무의 전통이 남아있는 당골 문화는 일본의 미코와 개념이 상당히 유사하다. "한국의 무당은 [[일본]]의 [[무녀(신토)|무녀]]처럼 [[아르바이트]]가 없다"는 말이 퍼져 있는데, 일본에도 [[도호쿠]] 지역의 이타코(イタコ), [[오키나와]] [[류큐 신토]]의 유타(ユタ)는 한국의 무당과 마찬가지로 신내림을 받는다. 또 한국에서도 무교 행사가 치러져야 할 때는 [[부채춤]][* [[부채춤]]은 현대의 창작무용이다. 즉, 현대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치르는 [[무속]] 행사도 전통종교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런 '비종교적이고 현대적인 민족 행사'를 통하여, 전통 무교에서 주술적인 행위를 줄이고 민족 종교의 체계성을 확보하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도 있다.]을 추는 아르바이트 무녀들을 모집하는 경우가 있다. 현대 한국에서 무턱대고 무녀라는 표현이나 현대 [[무속]] 행사를 배척하는 것은, 무교가 얼마나 일반인들의 사회에서 밀려난 존재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