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덤 (문단 편집) == 지역별 인식차이 == [[죽음]], 혹은 [[시신]]을 상징하는 무덤은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문화권에서 무덤을 딱히 혐오시설로 인지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에서도 반드시 무덤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기피하는 풍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교]]에서는 죽은 사람을 가까이해서도 안 되고 멀리 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이 있어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나 바로 옆에 묘지를 조성하지 않지만, 그래서 이 기준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가까운 마을 뒷산 같은 곳에 묘를 많이 썼다.[* 제주도도 산에 있는 경우가 있으나 예외적으로 밭 한가운데 묘를 쓰는 경우가 많다.] 산 곳곳에 중구난방식으로 산소가 조성된 경우가 보통이다. 이 경우 산소조성 당시에는 길이 닦여있어도 수십, 백여 년 지나면 수풀이 우거져서 길이 사라지는 일도 흔해서 꽤나 찾아기기 힘들어진다. 한국에서는 직계 조상의 묘([[무덤]])를 따로 산소([[山]][[所]])라 한다. 山이라는 한자가 우리가 흔히 아는 산의 뜻이 아닌 무덤을 뜻하기도 하고 산에 묘를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요즘도 한국 농촌에 있는 주택들을 차 타고 지나가다 보면, 아예 묘지가 집 바로 뒷쪽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걸 가끔 볼 수 있다. 죽은 조상을 추모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조상의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선호하는 문화권도 꽤나 있다. [[심시티]] 4에서는 도시가 어느 정도 커지면 공동묘지를 지을 수 있는데, [[한국인]]들은 당연히 주택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무덤을 건설했지만, 나중에 공략에 따르면 주택 가까이 있는 곳에 지어야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수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실제로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전 세계에도 주택가 옆에 떡하니 [[공동묘지]]가 있는 경우가 꽤나 있다. 이 경우는 무엇인가 하면 먼 과거에 마을이 작았던 시절에는 이 공동묘지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나중에는 마을이 공동묘지를 감싸버린 형태가 된 것이다. [[좀비]]물에서 공동묘지에서 좀비가 깨어나면 얼마 뒤 도심 한복판이 좀비로 가득 차는 게 이상한 게 아닌 것(…) 사실 유럽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문화권이고, 중세 이래로 마을들이 그 마을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마을 주민이 사망할 경우 교회 묘지에 묻히는게 당연한 것이었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본당이 동네 한복판에 있는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그때문에 아직도 공동묘지가 거주지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무덤이 거의 대부분 평평하게 되어 있는데, 산악 지대가 별로 없고 평야 지대가 많아서 많은 흙과 풀들을 쉽게 구해올 수 없기 때문에 봉분 없이 무덤을 만든다. 그러나 미국의 부유층들은 자기 조상님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과 동시에 자기 조상님들의 시신 훼손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돌과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무덤을 크게 만들기도 한다. 보통 공동 묘지라면 비석이나 추모 석판이 숙연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나라는 생각과 달리 무덤을 중심으로 주위에 산책로가 준비된 공원같은 분위기인 곳도 많아서 마을 주민의 조깅 코스가 되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유럽 문화의 직접적 영향이 강한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 한정이며, '''미국도 대다수 지역은 인구 밀집지대와 무덤이 멀리 떨어진 경우가 많다.''' 개신교와 유대교도 무덤을 부정한 공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산악 지대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그 많은 흙과 풀들을 쉽게 구해올 수 있기 때문에 봉분을 충분히 쌓아 무덤을 만든다. 또 중국의 경우 미국보다 역사가 훨씬 오래된 나라이다보니, 새 왕조들이 세워질 때마다 역대 군주들의 시신을 모신 무덤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일부러 묘지를 매우 크게 만들어 함부로 훼손하지 못하도록 했다.[* 대표적으로 [[진시황릉]]이 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항우]]가 도굴하고 진시황릉 일부를 불태웠다.(물론 진시황의 묘지는 불태우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다.)] [[프랑스]]의 경우 더 심해서, [[파리(프랑스)|파리]]의 몽파르니스 지역을 비롯해 여러 곳이 공동묘지를 공원 비슷하게 운용한다. 역병이 창궐하던 시절 죽은 선인들의 뼈를 깨끗하게 씻은 뒤 본래 [[고대 로마]] 시대에 탄광으로 사용됐던 지하 통로를 공동묘지로 용도변경하여 차곡차곡 쌓아뒀는데, 이게 현대 시점에서 상당히 그로테스크 하다. 자세한 것은 [[카타콤]] 항목으로. [[호주]] 사람들도 묘지를 혐오시설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묻힌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인데, 유령이 되더라도 도움을 줬지 해를 끼치진 않을 거라는 것. 하지만 이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무덤을 완전히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덤은 기본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관련된 괴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다만 워낙 오랜 기간 동안 무덤이 마을과 주변에 형성된 것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있는 것. (+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특별히 비참한 죽음이 아닌 이상 '죽음 자체'가 무서운 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천수를 다 누리고 [[자연사]]하는 비율이 오히려 적었고, 더 이전엔 맹수의 습격이나 당시 기준의 불치병 등 끔찍한 죽음이 자연사보다 오히려 더 흔했음을 생각하면.)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흔히 [[모스크]] 옆에 위치한 무덤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쪽 동네에서는 왕이나 성자, 고위 성직자의 무덤을 아예 집처럼 지어서 그 안에 [[관(장례)|관]]을 안치하는 식으로 만들기도 하며 여기에서 기도하려는 방문객으로 붐비기도 한다.[* 유럽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도 성직자나 사회 유력 인사들을 교회 안에 매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성 베드로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예언자 [[무함마드]]는 죽은 이에 대한 기도를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했지만 [[시아파]]가 성자 숭배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을 깊게 받은 [[터키]], [[이집트]] 쪽은 그냥 신경 안 쓰는 중. 터키에서는 오히려 죽은 이를 참배하기 편하다며 [[모스크]] 안에 공동묘지를 만들기도 하고, 지금도 고인이 죽은 날에는 고인의 무덤을 찾아서 [[꽃다발]]을 바치고 죽은 이에게 [[쿠란]]을 읽어주거나, 짤막한 기도를 올리는 풍습이 있다. 물론 튀르크 민족 고유의 풍습이라, 이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제도권 이슬람에서는 썩 달가워하는 전통은 아니다. 당장 [[잘랄 웃 딘 루미]]를 비롯한 성인의 무덤에 가면 터키 종교부 이름으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거나, 묘소의 나무에 소원쪽지를 매달거나, 맑은 물을 떠놓고 기도하거나, 동전을 던지는 행위는 우리 종교의 전통이 금지하는 우상숭배 행위이자 미신이므로 엄격히 금합니다." 라고 써놓은 공지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래도 할 사람들은 한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보면 알겠지만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시신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게 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굴에 넣고 바위로 막아서 부정타지 않게 했을 정도며, 현재도 이스라엘의 공동묘지는 외딴 사막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Graves_in_Israel|#]]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비상시에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매장]]을 했지만, [[불교]]의 영향력이 강력해진 [[고려시대]]에는 주로 [[화장(장례)|화장]]을 많이 하였다.[* 다만 고려도 왕족, 귀족은 매장을 많이 했다.] 그러던 것이 [[유교]]의 영향이 강해진 [[조선시대]]에는 다시 [[매장]]으로 바뀌고, [[풍수지리]]의 영향 역시 강하게 받으면서 무덤의 위치가 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무덤의 위치 자체가 으슥한 곳으로 바뀌고 일상 공간에서 먼 곳으로 변경된 점이 무덤에 대한 공포심을 증가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아직도 [[승려]]가 죽으면 화장을 한 후 부도([[승탑]])를 만들어 절의 입구 같은 곳에 안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대중들이 별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인식에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무덤이 무서워서 멀리 떨어진 건지, 무덤이 멀리 떨어지다 보니 무섭게 된 것인지는]] 연구해 봐야 할 일. 이후 [[일제강점기]]에 화장이 다시 생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매장이 대세였고 [[대한민국]]에서도 1990년대까지는 유교와 개신교의 영향으로 매장이 대세였지만[* 다만 이 때의 매장은 삼국, 고려, 조선 시절의 매장과는 많이 달랐는데 삼국, 고려, 조선 때는 석실묘와 회곽묘를 쓰거나 부장품을 곳곳에 넣었음은 물론, 고인이 생전에 입었던 옷을 입혔지만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의 매장은 그냥 땅에 묻고 매장을 했으며, 부장품도 넣지 않았고, 삼베옷을 입고 매장을 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일본, 미국, 유럽은 장례식을 치를 때도 엠버밍을 많이 하며 부장품도 꽤 넣고, 고인이 생전에 입던 옷을 많이 입힌다.] 이 때문에 묘지들이 차지하는 면적이 크게 늘면서 198~90년대에는 '이렇게 묘지들이 늘어자면 미래에는 전 국토가 묘지가 될 것'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는 주장도 나왔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다시 [[화장(장례)|화장]]이 대세가 되면서 이런 주장은 많이 수그러들었다. 한국에서 무덤이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 중 하나가 [[경부고속도로]]의 [[영락IC]]. 영락공원 설립당시 지역주민들의 ~~집값 하락~~ 피해를 막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로 직접 연결되는 도로를 냈다. 이에 따라 [[부산영락공원]]으로 들어가는 차량진입로도 자동차전용도로 취급을 받는 편. 보행자와 이륜자동차는 팔송에서 [[금정도서관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지만 장례 관련 차량들은 무조건 고속도로를 타고 들어가야 된다. [[북한]]은 [[2019년]] 이전까지는 [[매장]]이 대세였으나 [[김정은]]이 [[묘지]] 부족을 사유로 '''매장 금지령'''을 내려서 [[2021년]] 현재 [[화장(장례)|화장]]만 가능하다. [[https://www.asiapress.org/korean/2019/09/society-human-rights/kyubong/|기사]] 어떤 나라든 무덤을 이전하거나 국가적 사료가치로 인하여 발굴할 때는 유족이나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하며 한국같은 경우는 무덤을 발굴 할 때는 발굴을 시작하기 이전에 제를 올려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을 치른 다음 발굴을 시작한다. 과거에는 무덤에 부장품을 묻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무덤에 부장품을 묻지 않는 경우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