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덤 (문단 편집) == 사료적 가치 == 고대사에서는 오래된 무덤인 고분(古墳)이 지역사, 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각종 권력자들이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소지품 혹은 [[순장|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같이 묻었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대 변화에 따른 무덤 양식(묘제)의 변화를 지겹게 외웠던 것도 사실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이런 무덤엔 각종 비싸고 희귀한 물건도 많이 묻혀있고, 무덤을 파서 이런 물건을 훔치는 사람을 [[도굴꾼]]이라고 한다. 특히 무덤에 묻혀있는 물건들이 굳이 귀금속같이 엄청 비싼게 아니어도 그곳에 묻혀있는 과거의 편지나 의복 등은 왕릉같이 호화로운 왕족이나 귀족의 삶이 아닌 당시의 서민들의 생활상을 제일 밀접하게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요즘 [[조선시대]]의 무덤을 발굴할 때 조선 중기나 근세 때의 한글편지가 발굴되어 한글창제 이후의 한글의 변천과정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렇게 발견된 편지 유물로는 [[나신걸 한글편지]]가 유명하다.] 이 뿐만 아니라 장례식을 어떤 형식으로 했는지 당시 입던 옷이나 당시의 풍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무덤에 피장자의 의복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함께 묻는 경우가 많았다.] 편지같은 경우, 양반이나 좀 부유한 서민 무덤에 한정된다. 왜 그런가하면 보통 백성들은 거의 몸만 묻어주는 게 많다보니 글이 적혀진 기록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그렇다고 보통 백성 무덤은 무시당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당시 옷재질이 어땠는지 죽은 시신을 부검하여 그땐 뭘 먹었는지 그 시대 생활상 연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특히 무덤을 만들 때 주위에 생석회를 들이부어 만드는 조선시대 이후 묘제에서는 석회가 물과 반응하면서 고열이 나서 관속을 멸균하는 효과가 나고, 시신이 수백년을 썩지 않고 버티는 [[미라]] 상태가 되기도 한다. 400년 이상 된 파평윤씨 유해(미라)가 유명하다. 미라 항목으로. 다른 이야기인데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미라]] 같이 된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약 4, 5천 년 전 쯤에 누구에게 활을 머리에 맞고 살해당한 남성의 시체로, 발견지의 이름을 따 "[[외치]]"라고 불린다. 이런 시체조차도 부검을 통하여 당시 버섯에서 여러 식물과 새고기 같은 것을 먹었고 신을 묶는 끈이라든지 소지품으로도 당시 생활상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적어도 몇백 년 된 무덤의 가치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묘제는 그 문화권의 사후 세계관을 보여 주는 것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생활상은 서구화되었지만, 무덤의 형식만큼은 여전히 전통적인 봉분이며 [[화장(장례)|화장]], [[수장(장례)|수장]], [[빙장]] 등 자연장의 전파도 그다지 빠르지 않다. 세계화된 현대도 그런데 고, 중세라면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무덤의 양식과 그 부장품은 [[고고학]]적으로도 그 문화의 계통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역사고고학 #s-2]], [[고분문화]] 문서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