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령왕릉 (문단 편집) == 상세 == 무령왕릉은 연화문(연꽃무늬) 벽돌로 아치를 쌓은 아치형 벽돌무덤으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 금은 장신구, 석수(돌짐승), 동자상, 청동거울, 도자기, 지석 등이 있다. 무령왕릉에서 있었던 대규모 발굴 덕분에 백제시대에 장사를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양(남조)|남량]], [[왜국]] 등 동아시아 각국들의 문화교류, 각국 문화의 특수한 점과 공통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문화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고분이다.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무덤)|왕릉]]이자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다.''' 무령왕릉 말고도 [[무왕(백제)|무왕]]의 무덤으로 거의 확실시 되는 [[쌍릉]]도 있는데, 쌍릉은 주인은 확실시되었지만 역시 백제 멸망 후 천수백년간 이미 여러 번 도굴당한 상태이고 어찌되었든 무령왕릉처럼 주인을 확실시할 지석이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심증은 충분하지만 물증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공식적인 명칭이 무왕릉이 아닌 쌍릉인 이유이기도 하다. 무령왕릉이 만약 피장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면 [[송산리 고분군]] 7호분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무령왕릉마저 도굴되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예술품이나 국제무역수준은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백제의 장신구들을 비롯해서, 무덤의 주인과 건설 경위가 담긴 묘비석이 발견된 점이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다. 이 석판을 통해 무덤이 무령왕과 왕비의 것이라는 점, 왕과 왕비를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한 후에 정식 왕릉으로 옮기는 백제의 매장 풍습, 땅과 지하의 신들에게서 '토지를 사서' 무덤을 쓰는 개념 등이 알 수 있었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무령왕릉이 미발굴 고분으로 백제 시대 그대로 발견되었던 덕분이다. 도굴이 어려운 구조인 [[신라왕릉]]과 달리 [[백제왕릉]]은 출입구가 따로 존재하고 돌무지에 깔려있지도 않은 굴식 돌방, 벽돌무덤 양식이었기에 백제가 멸망해 꾸준한 관리가 중단된 이후에는 도굴도 매우 쉬웠다. 따라서 무령왕릉처럼 도굴을 피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 한국판 [[투탕카멘]]급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무령왕릉은 금제 관장식 등의 호화로운 유물 덕분에 해방 이후 고고학 최대의 발굴로 기록되었다. 또한 중국 [[남북조시대]] 남량(梁)의 영향을 받은 벽돌 양식의 건축으로 현재까지 고분 연구에도 대대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는 어수룩한 발굴 때문에 후회가 가득한 최악의 졸속발굴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립공주박물관]]이 기존 '무령왕릉실'을 '웅진백제실'로 개편하면서 무령왕과 왕비의 실제 목관을 2017년에 46년 만에 최초로 공개했다.[[http://www.hankookilbo.com/v/e26ef1cac9c846949804563c5e29f67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