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신정변 (문단 편집) == 개요 == '''무신정변'''(武臣政變). [[고려]] [[의종(고려)|의종]] 24년에 해당하는 [[1170년]] 8월에 고려의 [[무신#s-2|무신]]들이 보현원[* 오늘날의 [[북한]] [[장풍군]] 남단에 있었던 사찰.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의 청평사라고 알려져 있어서,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도 그렇게 자막이 달려 나왔으나 사실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12권 '장단도호부' 편에 보현원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고, '''의종이 자주 찾아 연회를 베풀었으며, 정중부가 문신들을 모두 죽였던 절'''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다만 이 춘천 청평사도 고려 시대에 건립된 절이고 이 절 역시 '보현원'이라고 불리기도 했기 때문에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에서 들고 일어난 정변이다. [[1170년]]이 경인년이기 때문에 경인의 난(庚寅亂)으로도 부른다. 경인년의 보현원 정변과 [[1173년]] 계사년에 일어난 [[김보당의 난]](계사의 난(癸巳亂))을 합쳐 '경계의 난(庚癸─亂)'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이전의 고려왕조는 사실상 멸망 상태나 다름없을 정도로 무너졌으며 국가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각종 군사세력에 의해서 걸핏하면 괴뢰정부 신세로 추락하길 반복했고, 정권을 장악한 군인 마피아에 의하여 지방 정규군도 해체당하여 자기보호 권리도 자주 잃는 등 국가망조의 첫 단추가 끼워지게 되었다. 실제로 [[의종(고려)|의종]] 이후 고려 왕실은 무신들과 몽골에 의해 허수아비 혹은 반쯤 허수아비 신세가 되어, 간섭없이 자주적인 왕권을 가졌던 왕은 [[공민왕]]까지 가야한다. --문제는 공민왕이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왕이라는거-- 결국 고려는 이 막장사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고려왕조의 엘리트층은 살아남으려면 무신정권과 피를 섞거나 지방으로 도주해야 했고, 저항하면 그대로 숙청당해 엘리트층이 왕조멸망 급에 비견될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무신정권은 의도적으로 지방의 정규군을 해체하고 국력 증강을 방해하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백성들과 지방군들이 정부를 대신하여 고려를 지켜냈고, 후대에는 지방귀족들마저도 무신정권보다 강력한 자들이 많았다. 고려 정부는 이 사건 이후로는 강력한 행정기반을 되찾지 못하고 무신정권, 몽골제국, 권문세족, 신진사대부에 의해 휘둘리는 초라한 모습을 반복하다가 멸망한다. 그리고 이시기 이후의 왕들은 [[명군]]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암군]]이 주로 나오기 시작했다. 당장 이 사태의 원인인 [[의종(고려)|의종]]도 암군으로 평가받는 중이기에. 당시 상장군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일으켰기 때문에 정중부의 난 또는 무신의 난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성공했기 때문에 난(亂)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다. 당연히 무신정권 당대에는 난이라고 보지 않았다. 사극 [[무인시대]]에서는 경인년 거병이라고 통칭하여 불렀다. 좀 더 엄밀히 따지자면 그냥 무신정변이라고 부르지 않고 2차 무신정변이라고 한다. 이미 이전에 문신들이 무신들에게 지급되었건 밥줄인 영업전을 강탈해가자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