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신정변 (문단 편집) === 문신과 무신의 갈등 === 무신정변은 문신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아온 무신들이 말 그대로 [[민란]]처럼 감정적으로 폭발해서 문신들을 대거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이 무신정변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 있으니, 바로 무신과 문신 간의 정치적 갈등이었다. 초기에는 의종 역시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무신을 되려 중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무신 정변의 주요 인물인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순검군, 견룡군(경룡군)이란 이름을 가진 일종의 국왕 호위 부대 출신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정변을 독자적으로 계획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인 것.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주의 호위 부대는 군주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따라서 비록 문신과의 차별이 있다곤 해도 이러한 특성상 차별 대우로 인한 감정적 행동으로 무작정 정변을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고려의 무신들 상황은 결코 단순히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정도로 설명하기는 힘들 정도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고려의 여진 정벌]]에서 얻은 전공을 기반으로 무신들의 입지가 탄탄해지기는 했지만 [[이자겸의 난]] 직후 [[척준경]] 일파를 숙청, 그리고 [[묘청의 난]]으로 인해 무신들의 입지는 꽤나 위태로워졌다. 이때를 틈타 기존의 문벌귀족인 문신들은 무신들의 권력을 도로 빼앗으려 하였다. 이로 인해 무신과 문신 간의 알력이 극심해졌고 정계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신정변 직전까지 고려 무신들의 권위는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개선된 편이었다. [[고려의 여진 정벌]],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통해서 무신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공을 세운 무신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무신들의 세력이 점점 더 비대해졌다. 그러나 문신들이 무신들을 하대했던 것은 변함이 없었고[* 문신에게 줄 토지 조세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신들의 영업전을 강탈한 사건도 있었다.] 갈등은 더 깊어져갈 수밖에 없었다. 무인들은 오히려 신분 상승의 기대를 품고 출세 욕구에 눈이 멀어 문신들에 대한 반감을 빌미로 이용해서 정변을 일으켰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는 신분 상승 가능성이 신라시대보다 더 높았고, 이것 때문에 들고 일어난 노비들과 평민들의 반란도 꽤 많았다. 예를 들자면 훗날 [[최충헌]]이 정권을 잡았을 때 노비들 중에서 유용한 노비들에게 신분 상승을 시켜주었고 무신으로 고용하기까지 하였다. 이때 이러한 사회상을 알았던 [[만적]]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만적은 "[[이의민]]도 천민 출신이었는데 왕의 자리를 노릴 정도로 강해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다른 노비들도 장군이 될 수 있는 판에 우리라고 못 할 게 뭐 있냐?"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 세력 결집을 시도했다. 물론 그렇다고 무신정권이 다 천민들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을 시작한 이의방은 전주 호족이며 60% 기간을 지배한 최씨정권의 최충헌도 귀족 출신이다. 실제로 무신들 사이에서도 천민 출신은 무시당하기도 했다. 출세한 천민 출신도 사무라이들과 비슷한 편인데 귀족 출신의 종으로 들어가 그들의 무력을 배워서 성공했다. 물론 귀족의 시종이었지만 평민들보다 신분은 높았던 사무라이들과는 확실히 다르기는 하다. 게다가 의종은 무신을 우대해서 불만을 해소한다거나, 아니면 거꾸로 아예 문신들에 힘을 완전히 실어주기 보다는 두 문무 신료들 간의 알력을 적당히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것에만 급급했을 뿐이었다. 딱 [[붕당]]들을 대하는 조선시대 임금들의 모습이었다. 더욱이 의종 말엽에는 거꾸로 무신들보다는 불만 많은 [[문벌귀족]]들과 [[환관]]을 우대하며 이들에게 정치에 간여할 수 있는 발언권을 줌으로써 의종은 즉위 초반에 자신이 직접 힘을 실어준 무신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결국 무신들은 자신들과 반목하던 문신뿐만 아니라 왕인 의종에 대한 정치적 반감과 적개심까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신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의종은 [[수박(무술)|수박희]]를 통해 무신들을 울화를 누르고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으나 이를 가만히 묵과할 문신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뢰]]의 모욕 행위를 역이용함으로써 아예 수박희를 했던 즉석에서 거사를 치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을 단순히 무신들의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일단 한뢰의 행위는 무신들에 대한 문신들의 우월감과 차별 의식이 바탕이 되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그보다 이 사건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과 그 과정에서 생긴 문존무비 차별 대우 및 문신들의 오만,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국왕 등이 불러낸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뢰]]의 [[이소응(고려)|이소응]] 따귀질 사건은 [[경인정변]]의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다. 결국 반감을 해소하지 못한 무신들이 왕실과 조정을 향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의종이 질펀하게 놀았다는 기록처럼 의종의 지나친 사치와 향락으로 인해 일반 백성들의 왕에 대한 원성 또한 매우 컸으며 이는 일반 병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무신 정변 당시 일반 병사들이 무신들의 행위에 대거 동조하였고, 무신들은 이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세력을 얻는 한편, 정변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문신들과 달리 정작 권력을 뒷받침해 줄 기반이 없어서 정권 안정화에 실패하였다. 게다가 문신들을 몰아내고 빈 권좌를 두고 무신들 내부에서 새로운 알력 다툼이 야기되었다. 자신의 힘을 믿고 걸핏하면 무신끼리 시비를 걸거나 군사를 일으켜 전투를 하고, 백성들을 문신들 이상으로 심각하게 수탈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서 민심 이반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정변 이후에는 정변 소식에 크게 고무된 지방 각지의 유력자 및 백성들이 잇따라 봉기하면서 무신 정권은 정변 초기부터 큰 난항을 겪게 되었다. 사실 이는 의종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의종이 정변 초기 국면만 어느 정도로 잘 수습했더라면 비록 우발적인 정변이었다고 해도, 과거 고려 [[현종(고려)|현종]] 때처럼 최소한 왕위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스스로 이를 주도하여 문벌 귀족들을 몰아내는 친위 쿠데타로 이 사건을 이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의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다가 결국 스스로 화를 부른 격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