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신정변 (문단 편집) == 후세 평가 == 이때부터 1270년 5월까지 약 100년간 [[무신정권]]이 시작되고 고려의 역사에는 피비린내가 더욱 진동하게 된다. 이후 고려는 문신적인 기풍은 크게 쇠퇴하여, [[이제현]]이 [[충렬왕]]과 문답할 때는 "글을 배울 곳이 없어 유학책 읽어야 할 사람들이 승려한테 글을 배운다."고 말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물론 [[최우]] 정권기에는 서방도 깔리고 [[이규보]] 같은 문인도 올라오고 [[상정고금예문]] 재판본 등 금속 출판물이 등장하는 등 비문명 사회로 전락한 것은 아니지만, 문(文)적 기풍이 크게 쇠퇴하고 남은 것 또한 정권에 종속되다시피 했다. 무신 정변은 한국사에서 몇 안 되게 '''집권 계층을 싸그리 물갈이'''한 사례로는 의미가 부정적으로라도 있는 사건이다. 특히 최근 들어 [[권문세족]] - [[사대부]]의 연결성과 [[훈구파]] - [[사림파]]의 연결성이 주목받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한국사에서는 더욱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묘청의 난]] 등 전조가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지방의 뛰어난 인물이 중앙에 합류, 중앙 귀족과의 교류로 성장'하는 식이 아니라 [[양반|'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면서 중앙에 진출하여 명예를 재확인'하는 식의 성장]], 그리고 여기에 힘입어 중앙이 지방 세력과 타협할 수 있을 정도의 연결고리를 갖게 된 것도 무신 정변으로 인한 집권 세력의 격변이 미친 영향으로 평가받는다. 고려 당대의 무신정변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알 수 없다. 고려도 조선처럼 나름대로 [[고려실록|실록]]을 편찬해왔지만 명종 이후 무신정권에 의해 실록 편수관이 잠식되고 말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무신 최세보(崔世輔)가 동수국사에 임명되어 실록 편찬을 감시했고 이후 무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무신 세력이 실록을 일일이 감찰했다고 한다. 또한 고종 대에 제작을 시작한 명종실록부터는 사관(史官)만이 실록을 편찬해야 한다는 규칙이 깨져버리고 이규보(李奎報), 권경중(權敬中) 같이 사관이 아닌 사람들이 실록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막장이었던 무신정권 시기와 원 간섭기 시기의 실록들, 더 이전으로는 예종, 인종 대 이후의 고려실록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도 비판을 많이 받았고, 객관적인 실록 편찬에 있어서의 반면교사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 당대의 공식 기록에서는 무신정변이 미화되었을 것이라 보는 견해가 많다. 반대로 조선시대에는 반란 그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과거 한국의 군사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한 자신들을 정당화할 명분으로 무신정변을 차별받는 군인들의 정당한 궐기로 포장하였다. 1980년대 중순 국민학교 사회 교과서에선 삽화로 문신들은 의종과 마셔라 부어라하고 무신들은 더운 여름에 중무장 상태로 경비나 서고 있는 그림으로 불만을 가질 만한 묘사를 한 적도 있다. [[1990년대]]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다시 무신정변의 '진취성, 정당성'(?)보다는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한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분석이 늘어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