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어인 (문단 편집) == 역사 ==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무슬림]]의 [[시칠리아]] 침공(827년)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시칠리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일부까지 점령하여, [[바리 토후국]]등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 원정군, [[노르만]]인의 침공으로 인해 [[11세기]] 말에는 남부 이탈리아의 토후국이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13세기]] 중반에 무어인을 추려내 추방함에 따라, 이 지역에서는 무슬림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으로 이슬람 국가가 세워진다. 이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여 8~12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물론 많이 이주해와도 당시 해운능력으로 그렇게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중동-마그레브 지역의 정치가 불안정해서 항로-육로 등 연결로가 위태로웠다. 그래서 인구에서 토착 이베리아인에게 열세였다. 하지만, 우마이야조의 특징인 아랍인 최고 우대정책에 의해, 한줌이였던 이들이 기득권층으로 떵떵거리면서, 높은 영양상태와 생활수준으로 많은 자식을 부양가능했고, 낮은 영아사망률과 확실한 혼처로, 현지에서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불어났다. 이런 현상은 전근대 지구 역사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반복되어서, 한줌의 지배층의 혈통의 기여율이 높고, 한줌의 침투민족의 숫자가 폭증하는 형태로 반복된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이슬람은 일부다처제 허용이라서 현지 인구펌핑이 쉬웠을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레콩키스타]]로 인해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여 마지막에 남아 있던 무어국가인 그라나다 토후국이 1492년에 멸망하였다. 17세기 초에는 [[무어인 추방|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어인들까지 추방]]해서 흔적을 지우려고 했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추방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지역도 있고, 먼 길을 돌아 다시 돌아온 비율도 높다. 지하에 숨어서 추방을 면한 경우도 있었다고. 물론 탄압으로 인해 몰래나마 유지하던 신앙이나 언어를 보존할 수는 없었고, 완벽하게 [[스페인인]]과 동화되었다. [[몰타]]는 열강의 각축장을 거쳐, 현재는 사실상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 지배의 영향으로 토착언어가 사라지고, 유럽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아랍어 방언]] 끝판왕인 셈계 [[몰타어]]를 쓰는 국가가 되었다. 15세기 말-16세기에 걸쳐 강제추방 당할 무렵 무어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미 눌러 붙은지 800년이 넘은 시점이었고, 이들이 고향으로 인식했던 곳은 당연히 [[그라나다(스페인)|그라나다]], [[발렌시아(스페인)|발렌시아]], [[세비야]] 같은 비옥한 남부 스페인의 도시들이었지 척박한 북아프리카가 아니었다. 언어와 종교는 같아도 대부분 이베리아 무어인들은 주로 도시민, 정주 농경 민족으로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현대 모로코와 알제리 일대 마그레브인들과도 정체성이 어느정도 분화되었고, 연고도 크게 없었던 상황이라 해적들이 뭐 같은 종교인들이라고 봐주는 사람들도 아니고 강제추방 과정에서 수많은 무어인들이 사기나 약탈을 통해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런 수난을 겪으며 어찌 그래도 마그레브나 오스만 제국에 정착한 무어인 난민들은 먹고 살길도 막막해졌겠다 바로 그 악명높은 [[바르바리 해적]]단에 대거 가입하는 걸로 자신들을 추방한 통합 가톨릭 스페인에 대대적인 복수를 가했다. 중세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지중해 기독교 국가들의 해군력 증강으로 인해 좀 잠잠해지는듯 싶었던 서지중해 마그레브 해적들은 이 무어인 추방으로 인한 인력 유입이 동시대 [[오스만 제국]]의 후원과 시너지 효과를 내어 그 숫자와 활동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인적자원 측면에서도 당시 추방당한 무어인들은 현지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도 대부분 능숙하게 구사했고, 현지 지리도 빠삭하며 심지어 많은 경우에는 추방 이전 현지인들과 이웃으로 교류하면서 어느 해안가 마을엔 누구네 집안이 몸값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유지니 경계가 느슨한 수확철은 몇월 며칠이니, 이런 식의 농밀한 현지 사정에도 훤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근대적 사회 통제 기술, 수단 발전 이전 전근대 국가의 사회 통제력의 한계란 어쩔 수 없는지라 같은 마을에도 어떤 무어인 집안은 얄짤없이 강제추방당한 반면, 그 사촌 집안은 적절한 타이밍에 성공적인 기독교인 코스프레+연줄과 지역 정치[* 주로 중세말 [[카스티야]]가 직접 정복, 재정착한 현대 안달루시아 일대는 무어인 박해에 지역 관민이 합심해서 나섰던 반면 통합 이전 [[아라곤 왕국]]령 발렌시아, 무르시아 같은 지방에선 오히려 대귀족 같은 강력한 토착 정치세력들이 종교재판소와 왕실이 주도하는 무어인 추방에 반발하고 지역 무어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아라곤 쪽이 딱히 뭐 더 착하거나 관용적이었다기보단, 이 일대는 기본적으로 재정복 자체도 13세기 정복왕 [[차이메 1세]] 시대에 비교적 일찍 이루어져 사회 구조도 더 안정적으로 자리잡았고, 무엇보다 중세 카탈루냐-아라곤 왕국 자체가 활발한 지중해 해상 무역국가였던 만큼 [[흑사병]]에 의한 타격도 카스티야보다 훨씬 심하게 받아서 종교도 덜 가릴만큼 지역 영농 인구 확보 자체가 절박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전히 남아 있는 등 실제 현지에선 영 어설프게 집행된 사례도 흔했다. 이러다보니 바르바리 해적 습격이 집중된 발렌시아 해안 마을 같은 지방들의 종교재판소와 시립, 지역 민병대의 기록을 보면 해적 단원들이 평소에는 아예 그냥 현지인인척 숨어 지내다가 미리 약속 잡은 거사일이 되면 마을 봉화를 끄던지, 파발마를 암살하는 식으로 깊은 내부침투와 호응 없이는 불가능한 정교한 작전을 짜서 털어먹는 등 그 활동의 규모와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안그래도 흑사병과 [[이탈리아 전쟁]]이 대표하는 중세말-근세 유럽의 정치구도 재편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서지중해 이탈리아, 이베리아 해양세력들에게 이렇게 정교하고 치밀해진 대규모 해적 창궐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치명타였고, 같은 시대 대서양 무역이 열리면서 장기적으로 지중해 무역의 몰락과 유럽 세계의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대서양 북방으로 이동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