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오사화 (문단 편집) == 결과 == 이후 줄줄이 사초들이 공개되었다. 김일손의 동료였던 다른 사관들도 김일손만큼은 아니지만 악의적인 소문 정도에 지나지 않은 걸 역사랍시고 사초에 기록하며 세조를 까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사초에 불순한 말을 쓴 사관들이 차곡차곡 걸려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썼다가 걸려든 사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태가 역모급으로 확장된 이상 용서는 없었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썼다는 것도 큰 문제인데 감히 왕실 능욕급의 사초를 생각 없이 썼다는 게 그 당시엔 봐줄 만한 일도 아닐뿐더러, 애당초 관직 생활 하는 이 사관들이 죄다 과거에 급제하고 나름대로 배웠다고 할 만한 이들인데 이 정도면 생각 없이 역모를 저질렀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무오사화로 인해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그의 형인 권경우도 이때 연좌되었으나 아내가 [[폐비 신씨]]의 6촌이라 죽음은 면하고 강릉부의 관노로 예속되었다. 이후에도 연산군은 권경우를 빨리 조정에 복귀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 권경우는 1501년에 죽었으며 생전에 "폐비 윤씨를 여염집에 놓아선 안 된다"라 간한 적이 있어서 갑자사화 때에도 무덤에 편안히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간한 게 폐비 사사로 직행했다(...) 참고로 권경우와 함께 이런 주장을 편 이가 더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채수다. 이 둘은 이 문제의 포문을 열어 성종 시기엔 잠시 처벌을 받기도 했다.]는 [[거열형]]. 이목, 허반은 [[참수]]형, 강겸[* 이 강겸의 처벌 과정이 좀 특이한게 원래 강겸은 참수형이었지만, 유자광의 변호로 유배형으로 경감된다. 강겸이 김종직의 제자인 걸 생각해 보면, 실록의 유자광이 김종직에 대한 악감정으로 무오사화를 벌였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러나 강겸은 이후 갑자사화 때 유배지 강계에서 능지처사를 당하고 아들 강형도 참수된다.], 표연말, 홍한 등은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형에 처해졌고, 이들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은 부관참시되었다. 또 사관이었지만 무오사화 이전에 죽은 신종호는 관작 삭제를 당했다.~~그래도 이 정도면 가벼운 거다.~~ 이 밖에 사림파의 무수한 사람들이 대부분 유배를 당했고, 김일손에게 소재를 제공해 준 사람들도 유배를 당했다. 특히, [[예천 권씨]]들이 많이 죽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 반대로 [[갑자사화|두 번째 사화]]에서는 [[광주 이씨]]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표해록]]의 저자인 최부도 김종직의 제자였기 때문에 이 일로 유배를 당했다. 연산군은 이들이 형을 당하는 과정을 모든 관리가 지켜보게 했고, 이 과정에서 '''낯을 가리거나 참석하지 않았던 관리들도''' 처벌받았다. 실록청 관리들 중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파직되었고,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은 좌천되었으며, 조위는 유배당했다. 이후 유자광은 8월에 다시 이 일을 끄집어내, 남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유배시켰다. 사실 이때 사림파는 역모 혐의 등으로 가루가 될 뻔했다. 이때 유자광은 "이자들의 악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간당들 일체를 뿌리 뽑아 버려야 조정도 깨끗해지고 뒤탈도 없을 것이다"라며 사림을 초토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훈구파이며 사림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사림으로부터 [[소인배]] 소리를 듣던 노사신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최대한 죽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앞에 했던 유자광의 말에는 "무령군은 무슨 말을 그리하십니까? 청론(淸論)하는 선비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지 없는 게 나라의 복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그 덕분에 사형이 확실시되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유배형으로 끝났다. 사림파도 그의 은혜를 생각해서, 나중에 《[[연산군일기]]》 등에서 유자광 등 다른 훈구파는 죽어라 비난하지만 노사신은 잘 비판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이 사림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소인배이니 군자답지 못하다느니 하는 비판이 반대를 위한 반대, 공격을 위한 공격임을 보여준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이런 사례는, 사림이 자신들과 대립하면 소인배라고 비난하며 끌어내리려 한 거지, 사람됨이나 능력, 학문적 소양 등을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옳기는 했다. 노사신의 경우 '''성종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학문적 소양이야 충분히 검증되었고 자신을 무자비하게 까대던 사림들을 옹호한 걸 보면 사람됨도 좋은 편이다. 반면 유자광은 서자 신분에 이런저런 약점으로 인해 살아남기 위해 어쩔수 없었지만 왕의 충견 역할에 더럽고 궂은 일을 도맡아야 했다. 때문에 이런 인물에 대해 좋은 평이 남을 리 만무. 학문적으로도 노사신과 비교하면 부족하다. 무재가 있다는 특출난 점이 있긴 하지만 당시 동양에서 무재는 별 취급 안 하는 건 평화로운 시대에선 다 똑같았다. 설령 사림파가 아닌 다른 이들이 평가해도 유자광은 호평을 듣기 어렵다. 하지만 위에도 나오듯 사림파는 그 전에는 노사신도 간신이라고 비난하며 파직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저들부터가 현석규를 소인이라 비판하더니 임사홍, 유자광을 몰아낼 때는 현석규를 소인이라 했다고 몰아내려 했다.] 노사신은 김일손의 사초 파문이 대형 옥사로 번질 듯하자 사안을 축소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다음과 같은 말들로 사림을 옹호했다. "연루자를 국문해야 하겠지만, 제자라고 모조리 국문하면 소요가 일까 걱정이 되옵니다.", "종직은 대역죄로 논하는 게 당연하지만, 김일손 등은 사문만을 찬양했으니 종직과 죄를 같이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위에 김일손의 행적을 보면 이 말을 꺼낸 것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까딱하면 (더군다나 평소 연산군에게 찍혔다면) "저 자식도 같은 놈입니다!" 라는 얘기가 돌아다녀 같은 꼴이 되거나 정말 낮은 등급으로 처벌받아도 다시는 벼슬할 꿈도 못 꾸게 되었을 테니. 노사신에게 다행인 점이라면 평소 사림들에게 간신배란 말을 들을 정도로 연산군을 옹호해 왔다는 것.] "청론하는 선비는 조정에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등. 노사신이 자신을 공격하던 사림을 이렇게 적극 옹호한 이유는 대간이 약해지면 신권 자체가 약해지고, 지나치게 강화된 왕권은 유교 정치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대승론(大乘論)적 시각에 근거한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노사신은 무오사화가 마무리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는데, "신의 소원은 상벌이 적절히 행해지게 되는 것과 전하께오서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는 것뿐이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다만 이 기사는 후대에 유자광의 무오사화 행적을 정리한다면서 넣은 기사로(연산 4년 7월 29일 기사) 해당 날짜의 기록은 크게 다르다. 우선 해당 기사의 출처로 예상되는 연산 4년 7월 26일의 사초 관련자 처벌 내용 기사를 살펴보면 노사신의 경우 "청론(淸論)하는 선비 등을 언급한 내용은 해당 기사는 물론 전후로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범 김일손을 역모죄 주범이 아니라 단순히 따른 종범으로 주장해서 능지처사가 아니라 참수형으로 낮추자고 주장했고 이걸 보면 정리 기사는 어느 정도 앞뒤가 맞다. 그러나 문제는 유자광의 경우로 정리 기사에는 유자광이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이자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작 26일 기사에서 유자광은 처벌을 막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도 아니고, 반대로 처음에 참수형으로 정해졌던 강겸(姜謙)을 정상 참작 여지가 있다고 주장해서 감형을 요청했고, 오히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저서 강겸(姜謙)은 참수형에서 곤장 100대에 강계 지역으로 유배형으로 감형받는다. 이 내용을 정리해 보면 정리 기사에서 유자광이 강력 처벌을 주장했다는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다. 이극돈은 당대 최고 명문 광주 이씨로서, 무오사화 당시 그의 벼슬은 좌찬성이었다. 다시 말해 차기 정승 1순위 자리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 때문에 다시는 정승직에 못 오르고 판서로 관직을 마치게 된다. 거기다가 어찌 보면 아무 잘못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후세에는 무오사화의 원흉, 주모자로 낙인찍히게 되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무오사화의 가장 큰 피해자들 중 하나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해 버리고 만 셈이다.]] 더군다나 그 5대손인 [[이이첨]]도 이 일로 인해 두고두고 까였다. 1년 뒤, [[충청남도]] [[천안]]의 유분 등 유생 몇 명이서 이것을 꼬투리 삼아 지들끼리 "바야흐로 '''걸주'''의 세상이네. 윤필상과 유자광은 [[남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어진 선비들'''을 죽여 재산을 타는구만", "금년에 바람 불고 천둥 친 것도 다 그 때문이지", "'''김종직이야 말로 진정한 충신이지'''", "'''그놈(유자광)을 쏘아 죽여버리겠다'''"라는 말을 했다가 박원성의 고변으로 들통나 목이 달아나거나 유배되었다.[*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년 11월 30일 임술 2번째 기사] ~~이 사건만 봐도 얼마나 상황 판단 못 하는지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