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왕(발해) (문단 편집) == 《신당서》 기록 ==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즉위하여 크게 영토를 넓히자 또 전중시(殿中寺)와 종속시(宗屬寺)를 두었는데, 각 시마다 대령(大令)이 있다. 문적원(文籍院)에는 감(監)을 두었다. 영과 감 밑에는 소령(少令), 소감(少監)이 각각 있다. 태상시(太常寺), 사빈시(司賓寺), 대농시(大農寺)에는 각 시마다 경(卿)이 있다. 사장시(司藏寺), 사선시(司膳寺)에는 각 시마다 영(令)과 승(丞)이 있다. 주자감(冑子監)에는 감장(監長)이 있다. 항백국(巷伯局)에는 상시(常侍) 등의 관직이 있다. 무관(武官)으로는 좌맹분위(左猛賁衛), 우맹분위(右猛賁衛), 웅위(熊衛), 비위(羆衛), 남좌위(南左衛), 남우위(南右衛), 북좌위(北左衛), 북우위(北右衛)의 8위가 있으며, 각 위에는 대장군(大將軍) 1명과 장군(將軍) 1명씩 있었다. 대체로 중국의 제도를 본뜬 것이 이와 같았다. 관리의 품계는 질(秩: 벼슬의 차례를 뜻함)로 표현하는데, 3질 이상은 자색 옷에 상아 홀[* 홀(忽)은 관복과 함께 쓰이는 것으로 손에 드는 도구. 왕에게 아뢸 문제를 잊지 않으려고 써 놓을 수첩같은 것. 길다란 판자처럼 생겼다. 이후에 수첩용도는 사라지고 의례용으로 쓰임.]과 물고기 모양의 금빛 주머니를 찬다. 5질 이상은 분홍색 옷에 상아 홀과 물고기 모양의 은빛 주머니를 찬다. 6질과 7질은 연분홍색 옷을 입고, 8질은 녹색 옷을 입는데, 모두 나무 홀(木笏)을 찼다. 발해의 민간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율빈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솜,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가자미이다. 과일로는 환도의 오얏과 낙랑의 배가 있다. 나머지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비슷하다. 유주절도부(幽州節度府) 동북의 여러 종족들이 두려워 복속하였다. 또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현종이 책봉을 내려 왕위 및 관할 영역을 세습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사자가 입조하자, 현종은 그 지역에 흑수주(黑水州)를 세우고, 장사(長史)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대무예가 신하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흑수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당나라와 통교하게 되었고, 지난번 돌궐에게 토둔(吐屯)을 요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렸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당나라와 함께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동생 [[대문예]]와 외숙 임아(任雅)에게 군사를 일으켜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대문예는 일찌기 인질로 당나라 수도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므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무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였다 하여 우리가 공격한다면 이는 당나라를 등지는 셈이 됩니다. 당나라는 대국으로 군사가 우리보다 만배나 되는데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곧 망할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가 전성기에 군사 30만으로 당나라와 맞서 싸운 것은 굳세고 강했다고 할 만하지만, 당나라 군사가 한번 이르자 땅을 쓸 듯이 다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군사는 고구려에 비해 삼분의 일밖에 되지 못하니, 임금께서 저들의 뜻을 어긴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러나 [[대무예]]는 듣지 않았다. 군사가 국경에 이르러 대문예가 다시 상소하여 간절하게 간하였다. 대무예는 화를 내어 사촌형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대신 통솔케 하고 대문예는 소환하여 죽이려 하였다. 대문예가 두려워서 사잇길을 통하여 당나라에 귀순해 오니, 당현종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제수하였다. 대무예가 사신를 보내어 대문예의 죄악을 폭로하고, 죽이기를 요청하였다. 당현종은 대문예를 안서(安西) 지방에 거처하라고 조서를 내리고, 대무예에게는 "대문예가 곤궁에 처하여 나에게 귀순해 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가 없어서 벌써 나쁜 곳으로 유배보냈다"라고 꾸며서 답장을 보냈다. 아울러 발해 사신을 머무르게 하여 보내지 않고, 별도로 홍려소경(鴻臚少卿)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에게 칙서를 보내도록 전하였다. 대무예는 당현종이 전후 사실을 숨긴 것을 알아채고 글을 올려 "폐하는 거짓을 천하에 보여서는 아니 되오"라고 꾸짖으니, 그 뜻은 반드시 대문예를 죽이라는 데 있었다. 이에 당현종은 이도수와 원복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 데 대하여 노하여 모두 좌천을 시키고, 거짓으로 대문예를 내쫓았다고 회답하였다. 10년 뒤에 대무예가 장군 [[장문휴]]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치니, 현종은 급히 대문예를 보내어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의 군사를 동원시켜 반격하고,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 다만 [[김유신]] 열전에 의하면 김사란이 아닌 김유신의 후손 [[김윤중]]이 신라군을 이끌었다고 한다.]을 신라에 보내어 군사를 독려하여 발해의 남쪽를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 측은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다가 이 제안을 계기로 국교 회복을 염두에 두고 군대를 출진했으니 마침 날씨가 매우 추운 데다 눈이 한 길(3m)이나 쌓여 군사들이 태반이나 얼어죽으니,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무예가 그 아우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서 자객을 모아 당나라 동쪽 수도인 낙양(洛陽)에 들여보내 길에서 저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자객들을 물리치고 살아났다. 하남부(河南府)에서 자객들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대무예가 죽자, 발해에서 사사로이 무왕(武王)이라 시호를 올렸다. [각주] [[분류:737년 사망]][[분류:발해 국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