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제(북주) (문단 편집) == 평가 == 재위 초반기에는, 월왕 [[구천]]에 버금가는 인내심을 보여준 끝에 권신 우문호를 죽여 형들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실권을 잡았고, 그 뒤에는 조정을 새롭게 개혁하고 인재를 우대하여 북제까지 멸망시키는 군사적 능력, 행정적 능력, 도덕적 능력을 모두 갖춘 [[팔방미인]]이자 뛰어난 [[엄친아]]였다. 또한 《[[자치통감]]》에 따르면 매우 검소하여, 항상 무명 옷을 입고 무명 이불을 덮고 잤으며 후궁도 1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할 정도로 충성스럽게 만들었고, 과감히 결단하며 법을 엄격히 적용했다. 거기다가 겨우 복수에 성공한 것만으로 헤이해진 구천과 달리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다. 결국 총평을 내리자면, [[막장]] 황제들이 즐비했던 남북조시대에 큰 획을 그은 엄청난 [[명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주시대의 관롱집단은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주요 세력이었기도 했고 말이다. 36세의 너무나 이른 나이에 요절했기에 진나라의 황제 [[진숙보]]의 존재를 감안하면 10년만 오래 살았더라도 천하를 통일했을 수 있다.[* 실제 천하를 통일한 [[수문제]] 양견과 무제 우문옹은 2살 차이였다. 그마저도 수문제가 2살 연상이었다.] 결국 요절해 버린 것이 너무나도 아쉬운 군주일 뿐. 중국의 대분열기를 거의 다 수습한 명군이었지만 천하통일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너무나도 안타깝게 요절했다는 점과,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조가 교체되어 버렸다는 점에서는 [[오대십국시대]] [[후주]]의 [[시영|세종]]과도 매우 비슷하다. 또한 둘 다 주나라의 황제이고 30대에 요절했으며, 다음 [[수나라|왕]][[북송|조]]에서 전국통일을 달성하고 불교를 억제한 [[삼무일종법난]]을 일으킨 군주라는 공통점이 있다. 삼무일종법난은 시호에 '무'자가 들어가는 3명의 황제와 '종'자가 들어가는 1명의 황제가(삼무일종) 불교 억압 정책을 펼쳤다는 것(법난)을 의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