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종(당) (문단 편집) === 회창의 폐불 === 또한 무종 시기를 규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정책 중 하나로는 '''[[회창폐불]]'''(会昌廢佛)을 들 수 있다. 그에 대한 서술은 아래와 같다. 그는 [[도교]]를 깊게 믿어 [[불교]]를 크게 탄압했는데,[* 무종이 폐불정책을 시행한 이유는 도사 조귀진 등이 무종의 신임을 얻은 후 불교와 도교의 공존이 불가하다고 주장한 것이 주된 이유이겠지만,[* 당은 도교를 국교로 삼아 건국했지만 불교와 도교의 다툼이 늘 이어졌다.] 무종 자신도 불교 승려의 존재가 자신이 수련을 쌓아 신선이 되는 데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 중국 역사상 [[삼무일종]]의 법난(불교 박해) 중 하나인 '''회창(会昌)의 폐불(廢佛)'''(845)을 단행해서 사찰 4,600개소를 헐고, 260,000여 명의 승려와 여승을 환속시키는 등 [[불교]]ㆍ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ㆍ[[마니교]](摩尼敎)ㆍ[[조로아스터교]](拜火敎)를 탄압했다. [[신라]]인 [[장보고]]가 세웠고 신라 상인들의 구심점이었던 적산 법화원도 이때 훼철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있는 것은 현대에 복원된 것이다. >황상은 승니(僧尼)가 천하를 줄이고 좀먹는 것을 싫어하여 그들을 없애려고 했는데, 도사(道士)인 조귀진(趙歸眞) 등이 그것을 권고했으며, 마침내 산과 들에 있는 초제(招提)와 난약을 먼저 부수고, 상도(上都)와 동도(東道)의 양가(兩街)에는 각기 두 개의 사찰만을 남겨두었으며, 매 사찰마다 승려 30명을 남겨두었고 천하의 절도사와 관찰사의 치소 및 동주(同州), 화주(華州), 상주(商州), 여주(汝州)에는 각기 사찰 하나만을 남겨두고, 3등급으로 나누어 상등(上等)에는 승려 20명을 남게 했으며 중등(中等)에는 10명을 남겨두었고, 하등(下等)에는 5명이었다. <중략> 재화와 전지(田地)는 나란히 관청으로 몰수되었고 사찰의 재료를 가지고서 관청과 역사(驛舍)의 지붕을 이었으며, 동상(銅像)과 종경(鐘磬)을 가지고서 동전을 주조했다. - 사마광 《자치통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