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후사 (문단 편집) == 최초의 무후사 == 제갈량은 213년 촉에 와서 무수한 번영과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처음에는 제갈량의 생일, 제사일, 그리고 [[청명]]절이 되면 각지에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거리, 골목, 야외에서 그를 위한 제사를 개별적으로 지내기 시작했다. 이런 제사는 중국 서남 지역의 각 민족 사이에서 빈번하게 행해졌다. 매년 이렇게 제사를 지내자 몇몇 관원들이 감동을 받아 조정에 상소하였다. 보병교위 습융, 중서랑 향충이 주도한 조정의 신하 무리들이 한꺼번에 군주에게 상소를 올려 사당에 대한 필요성과 구체적인 조치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에 263년 [[한중]] 면현 정군산에 사당을 짓는 것을 유선이 동의함으로서 첫번째 무후사가 생기게 되었다.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과 그 주석 양양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요(景耀) 6년(263년) 봄, 조령을 내려 제갈량을 위해 [[한중]]군 면양현에 사당(廟)을 세웠다. > >제갈량이 처음 죽었을 때, 도처에서 각각 사당 세울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예의등급과 작록품계를 따져 의논한 뒤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백성들은 사시 절기에 맞춰 도로 위에서 사사로이 제사를 지냈다. 간언하는 이 중에 어떤 이가 청을 들어주어 성도에 사당을 세우자고 했으나 후주는 따르지 않았다. > >보병교위(步兵校尉) 습융(習隆), 중서랑(中書郎) 상충(向充) 등이 함께 표를 올렸다, > >"신이 듣기로 주나라 사람들은 주 소공의 덕을 기려 팥배나무을 베지 않았고, 월왕은 [[범려]]의 공을 생각해 금을 주조해 그 형상을 보존했다 합니다. 한나라가 흥한 이래 작은 선행과 덕으로도 그 형상을 그려 사당이 세워진 자가 많습니다. > >하물며 제갈량의 덕은 멀고 가까운 곳에 모두 본보기가 되며 그 공훈이 말년을 덮으니, 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실로 이 사람에 힘입었습니다. 그런데 봄 가을의 제사를 가문에서만 지내게 하고 묘상(廟像)을 빠뜨린 채 세우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제를 올리고 융이(戎夷)들은 들판에서 제사지내게 하니, 이는 덕을 보존하고 공을 기리는 바가 아니며 옛 사람들이 술추(述追)하던 바도 아닙니다. > >지금 만약 민심에 모두 따른다면 어그러져 전범에 맞지 않고, 수도에 세우면 또한 [[종묘]]에 가까우니, 이것이 임금의 마음에 꺼리는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제갈량의 묘에 가까운 면양(沔陽)에 사당을 세워 친속으로 하여금 때마다 제를 올리게 하고, 무릇 그 신하나 옛 관원으로 제사를 올리려는 자는 모두 그 사당에서만 지내도록 한정하여 사사로운 제사를 끊는 것이 올바른 예법을 존숭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 >이에 비로소 그 말에 따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