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공(주) (문단 편집) == 생애 == [[강태공]]과 함께 형 무왕을 보좌하여 [[주왕]]의 폭정을 하는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달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달:女+旦) 문공이 상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훈련시킨 미녀라는 설도 있다. 주나라를 건국할 때 60세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노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 노나라는 현재 중국의 [[산둥성]] 곡부(취푸) 부근이며 공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문공은 장남 백금에게는 멀리 있는 노나라를 주고 차남 군진에게는 사후 자신의 주공 자리를 주니 그가 주 평공이다. 무왕 사후 나이 어린 조카, [[성왕(주)|성왕]]의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자신의 형제인 관숙[* 문왕의 셋째 아들, 즉 문공의 바로 위에 형이다. 관숙과 뒤의 채숙, 곽숙은 모두 무왕과 문공의 (어머니까지 같은) 친형제.], 채숙, 곽숙과 은나라 주왕의 아들 무경[* 상나라 세력을 달래기 위해서 무왕은 그를 제후로 삼았다]이 끊임없이 문공을 헐뜯자, 그는 성왕에게 '올빼미(鴟鴞, 올빼미 치, 부엉이 효)'라는 시를 지어 올려 자신의 무고를 호소했다. 이 시는 [[시경]]에 실려있는데, 올빼미는 자신을 모함한 관숙 등을 비유한 것이다.[* 올빼미는 중국과 한국에서 인식이 안 좋았다.] 이외에도 훗날 성왕이 성인이 되자 주공을 꺼려 쫓아내는데 그해 가을 갑자기 비바람이 일고 벼락이 쳐 커다란 나무가 뽑히고 익은 벼가 다 쓰러지는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 이에 놀란 성왕이 점을 치려고 점괘를 모아둔 금등(金縢)으로 된 궤를 열어 보는데 거기서 예전에 아버지 주무왕이 큰 병에 걸렸을 때 주공이 소공(무왕과 주공의 이복동생이자 주나라 초기의 명재상. [[연(춘추전국시대)|연나라]]의 시조이기도 하다)과 함께 무왕의 쾌유 여부를 점친 뒤 하늘에 제사 지내며 "'''제 목숨을 대신 거두시고 형님은 살려주십시오.'''"라 기도했던 제문을 발견하고는 문공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는 고사가 있다. 이것이 바로 영화, 영원한 제국의 화두로 잘 알려진 '금등지사'다. 이 기도문은 [[상서|서경]](書經) 주서(周書)에 동명의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안타깝게도 현존하는 서경은 후대의 위작으로 밝혀졌다. 결국 무경과 관숙 등이 훗날 삼감(三監)의 난[* 삼감이란 말 그대로 관숙, 채숙, 곽숙을 가리킨다. 본디 관숙 형제들은 무경을 감시하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이라 불리는 반란을 일으키자 문공은 출정하여 3년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당시 황하 중류에 머무르던 중국의 영역을 황해까지 넓혔다.[* 형제 간의 다툼을 마음 아파하던 주공은 귀환하면서 시를 짓는데 이 시, '아가위 나무(常棣)' 또한 시경에 실려 있다. 형제의 깊은 정리(情理)를 노래한 훌륭한 시. 그리고 [[시경]] 빈풍편에 실린 시는 대부분 문공과 관련된 시이다] 당시 중국 동부지역은 [[동이|이족(夷族)]]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환빠]]들의 떡밥이 된다. 이후에 호경 동쪽 낙수가 흐르는 땅에 도시를 세웠는데 이를 성주(成周)라고 했다. 지금의 [[낙양]]. 이후 어린 조카를 잘 보필하여 나라를 다스려 주나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 뒤 조카 성왕이 성인이 되자 주공단은 성왕에게 친정을 하라며 '''자발적으로 섭정 자리를 내놓고 자신은 신하의 자리로 물러나는 [[정권교체]]의 미(美)'''를 보였다. 물론 이런 문공의 행동도 그가 순수하게 도덕군자여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주나라는 친족 기반의 봉건 체제라 국왕 본인의 권력은 한정되어 있었고, 위치 자체도 그다지 튼튼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왕위를 찬탈해 다른 제후들의 지지를 잃고 본인의 영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불안정한 왕위를 차지하느니, 영지를 유지하면서 제후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으며 실권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오히려 문공에겐 명분과 실리 모두를 얻는 방법이었다는 것. 그러나 훗날 권신들 대부분이 권력의 맛을 보고 왕위를 찬탈하거나, 문공처럼 어린 조카의 섭정을 맡았다가 권력욕을 버리지 못해 조카를 몰아내고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 [[헌덕왕]], [[숙종(고려)|숙종]], [[세조(조선)|세조]]와 같은 사례들을 생각하자면[* 그나마 고려 숙종의 경우에는 조카인 헌종이 오래 살기 기대하기 힘든 사람이었고 숙종 본인은 통치를 그런 대로 잘한지라 그다지 욕을 먹지 않는다. 실제로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헌덕왕과 세조와는 달리 숙종은 헌종을 죽이지는 않았으며 헌종은 양위한 후 2년간 상왕으로 지내다 죽었는데 그가 평소 앓던 질환이 현대로 치면 1형 당뇨병으로 여겨지는 것을 보면 병사한 듯하다.] 문공의 결단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여담으로 교육자로서는 매우 엄격했던 듯하며, 전통적인 동아시아적 교육관을 가진 사람들이 으레 그랬듯이 체벌을 옹호했다고 한다. 아니, 시기적으로 봤을 때 반대로 이러한 주공단의 태도가 전근대 동아시아 교육관 형성에 영향을 줬을지도. 상술한 장남, 노태공 백금이 제후가 된 뒤에도 자기가 봤을 때 영 아니다 싶으면 언제라도 회초리를 들었다고 한다. 노태공의 생몰연대를 알 수 없으니 당시 나이를 정확히 짐작할 수야 없겠지만 제후직을 수행할 정도면 어찌됐든 성인이었을 텐데 천자의 섭정이라는 사람이 장성한 자식에게 직접 매질을 했다는 것. 한번은 이유도 알려 주지 않고 입조할 때마다 3번이나 연거푸 매를 휘둘렀는데, 이게 오죽 심했는지 노태공이 그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쯤되니 너무 심하다 싶어 동생, [[위강숙]]이 말리자 그도 같이 팼다(...). 나중에 동생과 아들을 때린 이유가 밝혀지긴 밝혀지는데 그 이유라는 게 고작 '윗사람을 우러르지 않고 공손하게 행동하지 않아서.'였다고(...).[* 다만 이것을 당대 관점에서는 고작이라 하긴 뭣하다. 전근대에는 대부분이 권위적이고 수직적이었으며 특히 동북아시아는 예법에 따라 철저히 구분되어 있었기에 윗사람을 우러르지 않고 공손하게 대하지 않는 것은 오늘날의 '저런 버릇없는 놈 쯧쯧...' 정도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노비나 평민같은 사람이라면 못배워먹은 놈이라 역시 예의도 차릴 줄 모른다고 넘어갈 수 있지 왕족씩이나 되는 사람이 윗사람에 대한 예의도 모르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더군다나 주나라는 종법질서에 근거해 왕위 계승, 지방 통치 등을 하는 나라였다.] 하여간 주공단의 이 고사는 "주공삼태(周公三笞)"라 불리며 보수적 교육관을 가진 이들에게 체벌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근거[* '성인 주공단도 체벌을 긍정했다!'는 식으로....]로 오래도록 인용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