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극겸 (문단 편집) == 생애 == 문극겸은 세 차례의 [[과거 제도|과거]]에 낙방한 끝에 큰아버지 [[문공인]]의 [[음서]]로 산정도감 판관에 머물다가 [[의종(고려)|의종]] 때 문과에 급제해 좌정언 직위까지 올랐지만 [[환관]] 백선연(白善淵)을 [[탄핵]]하다 [[황주군|황주]]판관-[[진주시|진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유사의 상주로 합문지후로 전임해 전중내급사로 승진되었다. 1170년(의종 24년) [[무신정변]] 당시 앞서 좌정언으로 직언하여 좌천된 일로 인해 화를 겨우 면하였으며 의종 역시 그의 말을 쫓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이 해 [[명종(고려)|명종]]이 즉위하자 [[이의방]]의 추천[* 기록의 면면을 살펴보면 [[무신정권]]기의 초창기 집권자인 이의방 일파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을 받아서 우승선-어사중승이 되어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하고 무신들로부터는 고사의 지문을 받았으며 용호군 대장군을 겸임한 후에 상장군까지 겸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대장군과 상장군은 '''무신들의 최고 권력기구인 중방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극겸이 문관임에도 대장군 직을 겸하게 된 것은 중방회의에 참석할 권한 때문이었다.] 이의방의 동생들 [[이린]], [[이거]]의 장인[* 이의방의 문신 학살 대상에서 벗어남은 물론 자신의 위치를 활용해 다른 문신들을 살려주기도 했던 것은 이런 내력도 한몫 했다.]이기도 해서 이의방이 자기 형인 [[이준의]]를 죽이려고 들 때 이의방을 뜯어말리기도 했으며 이후 김신윤, [[김보당]], [[이소응(고려)|이소응]] 등이 그를 이의방의 친형인 이준의와 도매금으로 묶어 탄핵하려 했던 기록도 있다. 이후 갑오정변으로 이의방이 암살당한 후 이의방의 형인 이준의는 그 도당들과 함께 살해당한 반면 이의방 동생들의 장인이었던 문극겸은 별 탈이 없었다. 이는 그가 이의방의 주변 인물이었을지언정 전횡에 떡고물을 받아먹는 주구 노릇을 했던 인물은 아니었고 문신임에도 무신들을 하대하지 않았으며 명종의 총애를 받는 유력한 문신으로서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중부]] 집권기 말년에는 당시 실세였던 [[송유인]]에게 탄핵당하는 일도 있었는데 송유인의 탄핵으로 수사공좌복야로 좌천되는 굴곡을 겪기도 했으나 얼마 안가 정중부 일파가 [[경대승]]의 [[정변]]으로 제거되면서 사실상 [[정적]]이 없는 유력 문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후로 문극겸은 대부소경-예부시랑-추밀원부사-태자태보를 거쳐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판호부사가 되고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에 오르는 등 경대승 집권기를 지나 [[이의민]] 집권기 초반까지 관직 생활을 하며 조정을 지키다 1189년(명종 19년) 사망하였고 남평의 장연 [[서원]]에 제향되었다. 이 때 당대 무신정권의 거두 중 한 명이었던 [[조원정]]을 중서문하성의 공해전을 빼앗았다는 이유로 여러 대신들과 함께 탄핵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조원정은 비슷한 처지의 [[석린]]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결국 처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