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무대왕릉 (문단 편집) === 알려진 역사 ===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뒤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안장하면 [[용]]이 되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고 [[유언]]하고는 재위 21년(681)에 사망했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서 장사하였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의 용이 된 부왕을 위해 인근에 왕사(王寺) [[감은사]]를 세우고,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까지 파 놓았는데 이 수로가 동해 바다로 이어져[* 지금도 대종천 강물로 이어지긴 하지만,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퇴적이 되어 그렇지 신라 때는 감은사 앞까지 바다가 들어와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대왕암으로 직결된다. 신문왕이 만든 전망대([[이견대]]) 역시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장소에 있다. 이 대왕암은 오랫동안 '댕바우(대왕바위)'라 하여 문무왕의 왕릉으로 알려졌고, [[해녀]]들은 이 근처를 신성시해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왕암이 한때 잊혀져 있던 걸 후술할 1967년에 '발견'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미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고유섭이 발표한 <경주기행의 일절>에서도 '모름지기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아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라'고 할 정도로, 이미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적이란 건 알 만한 사람들한텐 모두 알려져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방문객이 꾸준히 있는 그런 관광지는 아니라서 1970년대까지 대왕암 앞은 지금과 달리 인기가 하나도 없고 오가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말 그대로의 '동해 바다'였지만,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밤에는 참배객들이 마치 약속된 시간인 것마냥 기도하러 찾아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