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무대왕릉 (문단 편집) === 1967년 첫 조사: 바위 밑에 유골함이 있다? === ||[[파일:1488274547047.jpg|width=100%]]|| || 1967년 5월 16일자 한국일보 보도에 실린 문무대왕릉 바위 아래의 구조 모식도.[* 저 때에는 바위 아래에 문무왕의 유골을 담은 석함(유골상자)이 있었다고 생각하여 저렇게 작성했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도록 하자.] (출처: [[http://shindonga.donga.com/3/all/13/859539/1|신동아]]) || 1964년 10월 24일, 한국일보는 문화재청과 함께 신라오악학술조사 사업을 통해 문무왕릉에 대해 조사하다가 문무왕릉이 현재의 대왕암 바위라는 것을 알아내게 된다. 그리고 조사를 하게 되는데 이곳이 문무왕의 장례지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조사를 하게 된다. 정영호 교수를 포함한 3명의 학자들은 그 당시 대왕암까지 조각배를 타고 가서 대왕암 내부 웅덩이에 들어가 장대를 쑤셔 그 복판 바윗돌 밑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조사 성과를 토대로 조사단이 그린 대왕암 내부 모식도가 5월 18일자 한국일보 5면에 실렸다. 여기서 조사단이 그린 모식도에는 바위 밑에 유골상자와 부장품을 담은 [[관(장례)|관]] 같은 석함이 있다. ||[youtube(YWrdpXBhmtE)]|| || 대한뉴스의 1967년 당시 문무대왕릉 발견 보도 || 당시 조사단 중 한명인 정영호 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 >1967년 5월 15일 오전 10시에…필자는 [[김원용]]·김기웅 선생님과 함께 해중 능역(陵域)에 들어가 3t 무게의 복개석(覆蓋石) 밑에 용혈(龍穴)이라 칭할 수 있는 큼직한 암혈(巖穴)이 있음을 확인하여 길이 6m가 넘는 대나무 장대가 다 들어가도 모자람을 알게 되었다. 5월 중순 동해수(東海水)는 역시 냉기로 몸이 떨렸으나, 흥분된 1시간의 작업을 끝내고 나니 오히려 훈기가 들었다. 이 조사 내용대로라면 바위 아래 공간이 발견이 되었기에, 대왕암 내부 복판 바닥에는 관이나 유골상자를 안치할 시설을 안치하기 위한 홈을 파고, 그 위를 복개석이라 칭한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덮었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의견만 본다면 대왕암은 물속에 유골을 모신 수중릉의 개념과 일치한다. 당시에는 현재의 최신장비가 없어 주변을 직접 몸으로 부딪혀가며 조사했는데, 그 결과 바위 아래에 어느 정도 틈새나 공간이 있음을 알고는, 바위 아래에 유골과 부장품을 모신 공간이 있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파일:1488274515935.jpg|width=100%]]|| || 문무왕릉을 위에서 본 모습 모식도 (출처: [[http://shindonga.donga.com/3/all/13/859539/1|신동아]]) || 위에서 보면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 방향으로 십자 형태로 수로를 조성했음이 특징이다. 이는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의 산치대탑이나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하듯이 [[불탑]] 또는 [[승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수로의 한가운데 해수면 약간 아래에는 마치 [[관(장례)|석관]] 뚜껑이나 [[고인돌]]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위인 복개석(뚜껑돌)이 있다. 하지만 대왕암이 문무왕의 화장한 유골을 장사한 안장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공조성된 해중왕릉(수중왕릉)이 맞는가 하고 의문을 품는 의견도 있었다. [[황룡사]], [[감은사]] 등을 발굴했던 조유전이 쓴 <발굴 이야기>(1996년)에는 감은사를 발굴하는 도중 황룡사의 종이 대종천 근처에 빠졌다는 소문을 듣고 대왕암 근처를 조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993년) 등을 인용하며[* [[유홍준]]도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대왕암이 해중왕릉이라는 것은 아직 명확한 사실로 밝혀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감은사 종을 수색하면서 대왕암의 관 같은 뚜껑 돌을 들어올릴 수도 있었지만, 신비를 보존한다는 차원에서 들어올리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고 적었다. 사실 현재의 대왕암은 온전한 형태는 아니다. [[증보문헌비고]]에 인조 15년(1637) 10월 유전이나 가스전의 징후로 추정되는 땅불로 대왕암이 불타 바위가 일부 부서졌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경주 바로 옆인 울산 앞바다에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가스 자원을 채굴하는 가스전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