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민통제/대한민국 (문단 편집) == 역사 == 군사력 강화에 집중하면서 정복전쟁과 각종 전쟁들이 많았던 군사강국인 고구려나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경우 귀족 = [[군인]], 전사라는 경향이 강했으나, 11세기 고려의 안정화 이후 문신과 무신의 분화가 진행되면서, 소위 문민통제에 대한 논의가 [[문벌귀족]] 문신의 입장에서 무신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전시과 제도 개편과 관직의 등급 개편에서 무신에 대한 차별과 격하를 였볼 수 있다. 이러한 무신에 대한 차별과 격하, 통제권의 오남용으로 군사적 작전 실패 문제 등으로 전술적으로 승리하고 전략적으로 패배한 동북 9성 정벌의 실패가 초래되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과 이자겸의 난 이후 중앙권력 혼란기를 틈타 무신정권이 이어졌고, 이 시기를 통해 고려의 문민통제는 붕괴되버렸고 이는 표면적으로 원에게 복속하면서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고려의 멸망 때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조선]]의 경우, [[위화도 회군|군사력을 갖춘 지방 호족이 쿠데타로 왕조를 교체한 케이스]]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었다. 그 결과 [[태종(조선)|태종]][* 정작 본인은 아버지 집권 시절, 사병 혁파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도 그럴만한게 이방원은 본인이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으나 다섯 째라서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태조가 적장자 왕위 계승 원칙을 무시하는 병크를 저지르면서 이방원에게는 명분이 생겼고 건국된지 얼마 안 된 국가라 여러 정치 세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본인의 뜻을 이루려면 사병이 무조건적으로 있어야 했다. 왕이 절대권력을 지니는 전제군주정을 지지하는 인물이었으므로 그도 본디 사병 제도의 폐해를 알고 있었으나 본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병 혁파에 대해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이 사병을 혁파한 이래, [[경술국치|대한제국 멸망]] 전까지 모든 군권을 조정에서 장악했다. 지방의 군사력은 중앙정부가 파견한 행정관이 차지했다. [[병조판서]] 또한 거의 대부분 문관이 기용되었으며 유명한 장수들이 대부분 [[문관]] 출신이거나 [[무관]]들이 대부분 문관의 통제를 받는 거의 완벽한 수준의 [[문민통제]]가 이루어졌었다. 특히 서얼은 문과를 응시할 수 없고 무과와 잡과만 응시할 수 있게 한 것이나, 무관의 최고 품계가 한동안 종 2품이었다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업으로 가자는 생전 종 1품까지, 직책 품계는 정 2품까지 간신히 올라갔다.[* 다만 무관인 서반직의 최고 아문인 [[중추부]]는 종1품관을 수장으로 하는 곳이며, 당장에 임진왜란 직전에 신립은 정2품 한성부판윤을 맡은 적이 있고, 국초이기는 하지만 태종대에 조영무, 세종대에 최윤덕, 세조대에 홍달손은 정1품 정승자리에 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러한 문민통제도 삼군부의 무실화되고 [[비변사]]가 권력을 차지하는 동시에 5군영이 생기면서 점차 상층부와 중하층부 간의 균열, 상층부 문신들의 무신들에 대한 청탁과 인사 결탁 등으로 실질적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케이스를 볼 때, 군사력이 정파에 의해 언제든지 쿠데타로 동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관료조직화에도 불구하고 개인 인사의 권한 문제에 있어 완벽한 문민통제라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문민통제는 시대적으로나 비교사적으로 볼때 매우 수준 높은 편이었다. 심지어 일종의 [[민병대]]인 [[의병]]조차 그 지휘관은 향촌, 향림 등의 유림인 경우가 많았다. 당연한 게, 군사를 갖추려면 개개인의 무예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군사를 훈련시키고 지휘하는 방법 등 제대로 숙지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할 지식이 있는 것은 유림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병서 한 번 안 읽어봤을 리가 없다. 초기 대한민국은 문민통제인 듯 문민통제 아닌 문민통제로 시작했다.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광복군 출신이었고, 제2대 국방장관 [[신성모]]는 상선사관 출신으로서 중화민국 해군과 한국 해군에 몸 담은 적이 있어 해군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고, 일단 형식상으로는 민간인이었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신성모는 국군의 능력을 과장하고 북의 군사력을 오판하고 남침 예측이나 실제 상황도 무시하고 장병들을 농번기 휴가를 보내고 장성은 파티나 여는 대응으로 나라를 거의 말아먹게 했고 문민통제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만들었다. 게다가 그가 완전한 민간인도 아니고 해군 대접을 받는 준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신성모만 문제가 아니라 무능하거나 직위에 안 맞는 [[똥별]]들이 많았던 것도 문제.[* 군수, 행정에는 유능하나 야전지휘관으로는 영 아니었던 채병덕 등.] [[파일:(표4) 김정형(2021) 문민통제와 군인의 직급 재조정에 관한 연구.png ]] 위의 표는 5.16 군사정변 이전의 군인의 실제 직급을 연구한 자료에서 발췌한 표로 군사반란 이전의 문민 우위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박정희]]로 시작되는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문민통제는 완전히 무시되고 국방부 장관은 육사 출신[* 중간에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의 해병대 출신 장관이었던 [[김성은(군인)|김성은]] 제독도 있긴 했으나 김성은 역시 [[해군사관학교]] 1기로서 정통 사관학교 출신이었다.]의 최종 단계나 다름없게 되었고 10.26으로 이를 끝내는가 싶었으나 전두환과 하나회가 또 반란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고 군사정권을 다시 세워서 박정희 시절과 다를게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를 숙청하는 등 군부의 힘을 빼는데 성공하여 상황이 호전되었고 노무현 시절에는 비육사+중장인 윤광웅 제독이 국방부 장관을 맡기도 하는등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때 기무사가 불법적으로 계엄령을 모의하는 등 여전히 군부가 문민통제와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재인은 국방부 장관으로 민간인 출신을 임명하겠다고 하였으나 사정이 받쳐주지 못해서 타협점으로 예편한 지 10년 가까이 지난 해군(= 군인 물이 거의 다 빠진 비육군) 출신의 [[송영무]] 해참총장을 장관으로 임명했고, 후임에도 육군이 아니라 공참총장 출신의 [[정경두]] 합참의장을 임명하는 등 육사 카르텔이 조금씩 깨지고 비육사 출신의 장관들이 임명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정경두의 후임에는 다시 육사 출신의 [[서욱]] 육참총장을 임명하고 후임 육참총장에는 최초의 비육사 육참총장인 [[남영신]]을 임명, 육사 출신의 불만 달래기와 육사 카르텔 혁파 기조를 병행하여 균형을 꾀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